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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곱씹어 읽는 고전

논어(論語)-<학이(學而)편>02장.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解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유자가 말하길 “그 사람됨이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사람으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적다.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로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군자는 근본을 힘써야 하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겨난다. 효제(孝弟)는 인의 근본이다.


성서가 그러하듯 『논어(論語)』에도 공자의 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논어에서 “子曰”이라 하여 성씨(姓氏) 없이 나오는 말은 모두 공자(孔子)의 성을 빼고 공자의 말씀을 이르지만 유자(有子)의 경우처럼 앞에 성이 따라오는 것은 다른 이(제자)의 말이다.


유자는 공자의 여러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은 약(若)이다. 그는 공자의 고향인 노(盧)나라 사람으로 어떤 책에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을 따라 공자보다 33세 연하라 하고, 다른 책에서는 43세 아래라고 하기도 한다. 13세 연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어쨌든 그의 외모가 공자와 많이 흡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약에 대해 남성을 높여 말하는 ‘자(子)’를 붙인 것은 아마도 그의 제자들이 『논어』의 편찬에 직접 참여했거나 그 당시 나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其爲人也孝弟의 위인(爲人)이란 사람의 됨됨이를 뜻하는데, 효(孝)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을 말하고, 제(弟)란 형장(兄長)을 잘 받드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제란 동생이란 뜻이지만 이 구절 안에서는 형에 대한 동생의 마음을 뜻하고, 그것이 확대되어 윗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이란 뜻이 되었다. 후세에는 공경할 제(悌)로 표기하여 아우 제(弟)와 구별하기도 했다.

공자가 부모에 대한 효성을 높이 평가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농경시대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 질서(혈연공동체) 아래에서 효(孝)란 단순한 품성이 아니라 사회의 존속을 이루는 정치경제적 토대의 으뜸가는 기초 질서였으므로 공자가 이것을 높이 평가했으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공자가 사회를 인식하는 토대까지도 이와 같은 혈연공동체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했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만약 이 지점에서 공자가 사회를 혈연공동체의 연장으로 단순하게 파악했다면 공자를 합리적 봉건주의자라고 비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런 측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자를 계승했다고 평가되는 맹자(孟子)에 이르면 역성혁명(易姓革命)까지 인정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그렇다고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공자는 중국 춘추(春秋)시대의 인물로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그가 청장년기를 맞이할 무렵, 노나라의 정치는 극도의 혼란 상태에 있었다. 삼환씨(三桓氏)를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계시(季氏)의 세력이 커져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정권을 농락하여 노나라의 임금마저 그들의 수중에 있었다. 자신들의 토지를 넓히고, 거느리고 있는 가신들에게도 멋대로 국가의 재물을 나눠주었다. 참다못한 노의 소공(昭公)은 후씨(后氏)와 연합하여 무력으로 계씨를 제거하려다가 삼환씨가 합세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겨우 제 목숨만을 살려 이웃한 제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소공은 결국 7년 동안 제나라에서 망명자로 살다가 객사하고 만다.

공자는 노나라의 현실에 실망하고 소공을 쫓아 제나라로 갔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 (Thomas Hobbes, 1588~1679)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금할 수 없고, 개인의 힘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自己保存)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까닭이 크롬웰의 청교도혁명의 변질이 초래한 극도의 혼란상황에 실망했기 때문인 것처럼 공자 역시 자신이 처한 역사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출발점은 홉스와는 정반대였지만).

‘인(仁)’이라는 말은 『논어』에서만 무려 105번이나 나올 만큼 중요한 주제이지만 공자 자신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공자 자신이 인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자가 스승으로서 묻는 사람의 수준이나 처한 환경, 배경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논어』에서 공자의 말 다음에 첫 번째로 ‘인’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것이 공자 자신의 말이 아니라 제자인 유약의 말, 그것도 공자의 본래 의도에 비해 상당히 강한 어조로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것이 인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자가 말하는 학(學)이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학의 목표와 같다면 그것은 매우 정치적인 배움(실천)을 내포한다고 했을 때, 유학의 주장은 공자의 가르침을 개인적인 행동윤리 규범으로 상당히 축소하는 것이 된다. 물론 공자는 성인들의 행동양식을 존경하고 따르는 실천규범으로서 예(禮)를 강조했지만 공자가 강조했던 예(禮)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다. 공자에게 예란 인간을 속박하는 규범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한 결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의미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이 있다면 예란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행하였음에도 저절로 예에 벗어나거나 어긋나지 않아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공자에게 예란 상하관계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위계질서나 명령체계가 아니라 인(仁)에 이르는 도(道)를 추구하기 위해 편의상 요구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자의 사후에 공자의 제자들 사이에서 유약이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다는 것을 미루어 예측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공자와 비슷하게 생긴(당시에는 신체의 유사함 역시 매우 중요한 미덕이 될 수 있었다) 유약을 스승의 대리로 높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자 뒤늦게 공자의 제자가 된 증자(曾子:曾參)가 노여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자를 누가 계승할 것인가를 놓고 제자들 내부에 알력이 있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인(仁)은 앞서 말한 것처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설명되고 있는데, 매우 소박하게 이해한다면 인의 근본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유약은 이후에도 「학이」편에 두 차례(12, 13) 더 등장하는데 모두 예(禮)를 강조하고 있다. 본래 가르침이란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규범화되고, 어구(語句)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정통의 권위에 기대려는 마음이다. 공자 자신이 인에 대해 설명할 때 다양한 형태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인(仁)을 실천하고 있는 주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갈수록 인은 규범화되고 인의 외연이라 할 수 있는 예가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본래 공자의 사상과는 그만큼 거리가 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의 인(仁)이란 앞서 말한 것처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설명될 수 있지만 매우 소박하게 이해한다면 그 근본은 내 안의 본성을 깨우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君子務本 本立而道生(군자는 근본을 힘써야 하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겨난다) "고 했던 유약의 말은 옳다. 하지만 도(道)는 길이자 목표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