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환상이다 | 기시다 슈 지음 | 박규태 옮김 | 이학사 | 2000
성은 일상의 이면에서 표면으로 떠올랐고, 말초적인 성(sex)으로부터 학문적인 접근 방식의 성에 이르기 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담론들이 있다. 그럼에도 성담론은 여전히 일반인의 접근을 가로막는 형태(말초적인 차원부터 고급한 차원까지)로 왜곡되어 있다. 가령, 성의 매매춘 문제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이 남근주의 사회, 자본주의 체제, 가부장적 질서 속에 여성에게 강제된 것이라고 항변한다. 맞는 말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도 반론들은 늘상 존재해 왔다.
여성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매매춘에 임하는 경우는 어찌 보아야 하는가? 경제적 궁핍의 정도, 사회적 지위, 문화적인 레벨과 상관없이 자발적인 매매춘에 임하는, 점차 교묘해지는 탓에 매매춘으로 비추지 않는 여성의 상황을 페미니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답할 것이 없을리 없다. 그런데 어쩐지 가부장적 질서, 자본주의 체제, 남근주의 사회의 주장 보다 힘없이 들린다. 일반 대중들이 그 의견에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단지 무지한 탓만은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논쟁적이며, 심리학과 페미니즘 사이에 감정적이 아닌 학문적으로 뒷받침되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물론 이책에서도 매매춘은 지탄의 대상이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 금욕적이거나, 성차별적이거나, 혹은 자유분방한 성 관념을 체득하게 되는 것일까? 라는 질문, 인류(여성)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라는 매매춘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일까, 아니면 여성의 본능 중 하나일까? 와 같은 질문에 대해 이제껏 답해준 책은 그리 흔치 않았다.
이 책은 이렇듯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이 얽히고 섥힌 성 담론에 대해 그야말로 일반인의 수준의 궁금증을 품고 성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앞서 매독의 이야기처럼 근대의 발명품들 - 사랑, 연애, 결혼의 신화 - 에 대해 기시다 슈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질문은 평범하고 일반적이지만 답변은 평범하고 상식적이면서도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성 담론의 여러 측면에서 공세적 입장에 있는 페미니즘을 먼저 접한 이들에게 기시다 슈의 견해는 일견 남근주의적인 환상을 북돋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입장을 십분 고려한다 할지라도 남성의 성의식에 대해 이제껏 '기시다 슈'만큼 정직하게 답한 학자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 '성은 환상이다'는 다른 말로 하자면 '성은 현실이다'가 될 수 있다.
그는 일반인들이 가질 만한 평범한 의문들로부터 출발해서 성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우리의 본능에서 이성적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자칫 방만해지고 논점을 벗어날 수 있는 대목에서도 그는 일관된 입장에서 이 논의들을 끌어나가고 있다. 기시다 슈의 주장이 마음에 안 들 수는 있지만 섣부르게 반박하기 어려운 까닭도 거기에 있다. 만약 이 책을 반박하고자 한다면 감정적인 비평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에서 접근하여 반박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의미에서 기시다 슈는 어떤 페미니즘적인 입장보다도 단호하게 성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성은 환상이다'라고 말하면서 성이 무의미하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의 전세계적 도래가 불러온 변화가 성의 본질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있음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다.
이 책은 혼란스러운 기존 성담론과 통념들에 대해 프로이트 학파의 심리학자 기시다 슈가 응수하는 성의있는 답변이다. 그는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성욕의 기원, 남녀 관계의 양상, 성차별, 강간, 매춘 등의 지독히도 인간적인(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침팬지 세계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는 보고가 있긴 했지만) 현상들을 밝혀나가고 있다. 일례로 강간은 인간의 본성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성격과 문화가 규정한다는 것이나, 남성의 성욕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참을 수 없다는 통념이 거짓이라는 그의 질타는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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