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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인문학

에릭 홉스봄 -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 끌리오(2000)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 에릭 홉스봄 지음/ 강주헌 옮김/ 끌리오(2000)

Photograph: Eamonn McCabe

"에릭 홉스 봄"
은 현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다. "학문에는 국적이 없으나 학자에게는 국적이 있다"는 말처럼 때로 학자의 국적 못지 않게 지식인에 대한 이념적 구분, 좌파냐, 우파냐로 구분되는 것은 일정한 지적 편향성을 지녔다는 말과 동등하게 대접되고는 한다. 가령, 사무엘 헌팅턴, 후란시스 후쿠야마, 기 소르망과 같이 그들이 속해 있는 집단 혹은 이념적 편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 - 이들은 <조선일보>가 특히 사랑하고 석학(?)으로 대접하는 해외 지식인들 - 가 있다. 때에 따라 이런 지식인들은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집단(가령 "네오콘"이 자본을 대고 있는)의 연구소에 소속되거나 그들의 브레인, 이데올로그 역할을 한다. 과거 미국사회를 가리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라고 했는데 현재는 이보다 더욱 나아가 군정산학복합체 (MAGIC : Military-Academic-Governmental-Industrial Complex)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그들의 이름은 세계적 석학, 문명비평가라는 허울로 우리 사회의 수구보수매체에 학문적 근거로서 주장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에릭 홉스 봄을 우리 세기의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물론 그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에릭 홉스 봄을 그렇게만 규정짓는 것은 일정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에게 정치적, 이념적 좌,우를 묻기 이전에 그의 인간 됨됨이, 지식인됨의 인격을 먼저 평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는 1917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1933년 영국으로 이주한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빈과 베를린, 런던, 케임브리지에서 연구했다. 이후 런던의 버크벡 칼리지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수로 강의했다. 그는 또한 평생에 걸쳐 공산당원으로 남았다. 우리나라에 그의 저서가 처음 소개된 것은 지난 1976년 한길사를 통해 <의적의 사회사>가 출판된 것이었다. 유신 시대의 출판이란 맑스, 사회주의, 혹은 사회학적인 용어들이 제목에 사용되기만 해도 엄격한 검열의 대상이 되어 금서가 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기에 그 자신이 공산당원인 학자의 저서가 버젓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그 이면엔 여러 사정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에릭 홉스 봄 자신이 학문적으로는 특별한 정치적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그 자신의 학자적 양심에 의거한 연구를 했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그는 좌파의 기본적인 원칙들, '시장경제'와 이윤에 의해 좌우되는 체제에 반대하지만, 동시에 민중, 노동자계급의 약점도 날카롭게 비판해 마지 않는다. 그는 1962년에 앞으로 그의 기념비적 저술로 남게 될 근현대 4부작의 첫째 권인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를 출판하고, 이후 1975년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 <제국의 시대(The Age oj Empire)>(1987)를 출판하여 근대시리즈 3부작을 완성했다. 속칭, 세계사 3부작이라 불리우는 이 시리즈의 속편격인 <극단의 시대(The Age of Extremes)>를 출판한 것이 1994년 그의 나이 일흔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열정과 관심을 그의 저술에 담아내었고, 이는 때로 뉴올리언즈를 기반으로 한 재즈로부터 영화에 이르는 인문학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에게서 종종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영화에서 스페인시민전쟁에 참전했던 영국의용군 병사들은 노인이 된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에 대한 정절을 지킨다. 

이 책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는 그런 에릭 홉스 봄이 이탈리아의 신문 <라 레플리카>의 런던 특파원 안토니오 폴리토와 나눈 대담을 묶은 책이다. 국내에서 출판된 책 중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최근 그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는 책이며, 그의 저술이 아니라 직접 그가 한 대화들을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에릭 홉스 봄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일독을 권유할 만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에릭 홉스 봄이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나, 그에 대해 평소 관심있지만 개인이 신문기자와 나눈 그렇고 그런 대담에서 뭐 그리 얻을 게 있을까 의심하는 이들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바로 에릭 홉스 봄이기 때문이며, 이 책에는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새로운 세기에 대한 세계적 석학의 고민과 분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대담을 엮은 이 책은 주제에 따라 지난 세기에 발생했지만 미래에도 여전히 영향을 줄 수 있는 여섯 가지 주제로 구분된다.  그것은
"전쟁과 평화, 서양 제국의 몰락, 지구촌, 좌파에게 남은 것, 호모 글로발리자투스, 1990년 10월 12일" 등인데,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많은 곳에 밑줄을 치게 되고 공감하게 되는 일이 잦아지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과거를 되짚고, 새로운 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분석한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주어 가까운 미래를 전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세기에 대한 보다 거시적이고, 구체적인 전망에 따른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끝까지 공산당원으로 남은 이유를 묻는 이탈리아 기자에게 홉스 봄은 이렇게 말한다.

"대의(大義)를 향한 충성심, 그리고 그런 대의를 위해서 희생했던 사람들을 향한 정절(貞節)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