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1~5 | 최성일 | 출판사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이 책의 저자 최성일 씨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출판평론가이다. 몇 사람 안되니까 그 희소성만으로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무엇보다 그의 고집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클래식음악 애호가들의 수준이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때로 어느 음반의 어느 연주가 보다 수준이 높고 진정한 명반인가를 가리기 위해 수일 밤낮에 걸쳐 토론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주도(酒道)에 층위가 있는 것처럼 애호가에도 층위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독서에 그런 층위를 부여하는 것은 때로 우스운 일이다. 그 까닭은 독서라는 것 자체가 감성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고, 그 대상 범위가 음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넓기 때문이다.
그가 1967년생이니까 나보다 불과 3살이 많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와 두어 차례 실제 만남을 가진 적이 있고, 비교적 단순하지만 서로의 입장이 뒤바뀐 관계를 맺은 적도 있다. 처음 그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잡지의 청탁자와 필자의 관계였다. 그리고 두번째 만남에서는 그가 청탁자이고 내가 필자의 역할을 했다. 그 무렵 그는 <출판저널>의 기자로 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다음번엔 내가 몸담은 잡지의 고정 필자로 그를 선정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에 대한 객관적인 독후감을 쓰기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최소한 이번의 경우엔 그런 서평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남들보다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 이유로 대학에선 동기들에게 형이나 오빠로 불리우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가끔 동기들에게 어떤 시인의 시집부터 읽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조언을 구하는 일을 겪곤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대학 시절의 용돈이란 빤한 것이고, 내가 다니던 학과는 타학과에 비해 많은 독서를 필요로 했다. 그러니 한정된 금액으로 헤매지 않고 좋은 시인, 혹은 좋은 작가의 좋은 책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들에게 늘 야박하게 굴었다. 책이란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이 가장 좋다는 다소 우둔하기 까지 한 독서관을 가진 탓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저 인간은 나보다 독서 체험이 풍부할 거야란 선입견이 작용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의 내가 그네들에게 뭔가를 추천해도 좋을 만큼 더 많은 독서를 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힘들여 얻어낸 얄팍한 경험이나마 그네들에게 손쉽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지금이나 그때나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런 계산 속 때문은 아니라고 자부하고 싶지만). 어쨌든 그런 것을 물어온 친구들에게 나는 별로 도움이 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이 헤매라, 그러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말만 되풀이 해주었을 뿐 나는 손쉽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무렵 알게 된 나와 세 살차이의 동기는 "내가 형 나이가 되면 형보다 더 많은 책을 읽어서 형의 야코를 죽여 줄 거야."라고 말했다. 그 친구에게 다시 메일을 받은 것이 몇 해전의 일이다. "지금 나는 그 때 형의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형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해와서 혼자 웃은 적이 있다.
책을 읽는 독서 체험이란 결국 공유할 수 없는 체험이다.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일이란 얼마나 손쉬운가? 우리들은 실제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영화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에 노출된다. 그런 까닭에 막상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영화에 대해 질려버리곤 한다. 하지만 독서란 그와 같을 수 없는 체험이다. 일단 독후감을 읽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영화 읽기 보다 훨씬 섬세한 문자의 결을 헤짚게 되고, 자기만의 문장을 찾아내고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후감은 단순히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줄거리를 말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읽기에 따라 독후감 만큼 지루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독서란 피라밋을 쌓는 일에 비견될 만하다. 가령 프로이트를 읽지 않고서는 제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이해할 수 없다. 카를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서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서가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또 이들을 읽지 않고서 문학 작품을 접하는 것 역시 허전한 짓일 뿐이다. 그것은 구약성서를 읽지 않은 채 유태인을 이해하겠다고 덤비는 것과 같다.
지금은 입시 제도가 많이 변해서 과거 우리가 학창시절에 줄줄이 외워대던 시인과 작가의 작품과는 다른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고, 보다 폭 넓은 독서체험을 요구하는 시험문제들이 출제된다. 가끔 나이어린 사촌동생들의 문학교과서와 참고서를 들춰보다가 나는 김수영과 김지하, 정희성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곤 혼자 웃는다. 한동안 우리들은 그들의 시집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상이 불온한 인물로 오해받곤 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경험은 종종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유명 여가수에 의해 쇼프로그램에서 불리워지는 것만큼 이질적인 체험이다. 어쨌든 이런 변화에 발맟추기 위해 참고서 회사들은 어린 학생들의 부족한 독서체험을 보충하는 다양한 출판물들을 상업적으로 출판하고 있다. 대학 시절의 나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문의해왔던 그네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책들이 지금은 쎄고 널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류의 읽기 쉽게 간추려 논 "고교생이 읽어야 할 101개의 국내 단편 명작"이나 "사상" 시리즈와 같은 책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당연하게도 그런 류의 책들이 실제 독서 체험을 통해 얻어져야 할 당연한 경험들을 가로챈다고 생각한다. 가령,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고전 소설들을 원고지 50매 내외로 간추린 다이제스트를 읽는다면 이건 명작 고전을 읽는 훌륭한 독서체험이 아니다. 그건 독서체험을 빙자한 날치기 범죄 행위를 먼저 배우는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이 경험이 도움이 되어 훗날 명작 고전을 읽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겠으나 대개의 경우엔 다이제스트를 읽은 뒤 골치아픈 고전의 엑기스를 다 체험한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그것은 번역물인 책의 경우 완역인가 아닌가? 일어중역인가 아닌가? 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실례로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는 누구나 다 읽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이 책이 국내에 완역된 것은 지난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이전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이 거인국과 소인국 이야기밖에 없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최성일 씨의 이 책 역시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 해외 사상가 70명과의 즐거운 만남> 역시 그런 류의 손쉬운 다이제스트 북으로 짐작하기 쉽다. 물론 이 책도 그런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그런 류의 책들과는 확실히 다르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유는 이 책이 선정한 70명의 사상가들에 공감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그 자체로서 이들 사상가의 입장과 이론을 정리하는데 주안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종의 가이드 북이고, 지도책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70명의 사상가들의 생애와 그들의 입장,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관심 가질 수 있는 사상가들의 저서 중에 국내 번역 출판된 것이 무엇이 있으며 그들 책 중에서 어떤 책을 고르는 것이 자신이 그 사상가에 근접해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인가를 소개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버틀란드 러셀로부터 미셸 트루니에를 망라한다. 물론 이들 사상가들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관심이 가는 사람에 대해 보다 치밀한 독서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언자이자 충고거리가 된다. 이 책은 다루고 있는 인물들, 사상가들의 글만큼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충분한 독서 체험을 하지 않은 이들에겐 이 책이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최성일은 머리말과 후기를 통해 글을 보다 쉽게 써달라는 충고를 무시한 까닭에 대해 말한다. 쉽게 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란 그의 독서관이 관철된 것에 대해 나는 순수한 독자의 입장에서 매우 미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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