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사랑
-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이제 내년 4월이면 아내와 한집살이, 한몸살이 한 것이 만 4년이 된다. 서로 30여년 가차이 다른 환경, 다른 인생을 살아왔으나 우리는 또 얼마나 가깝고도 먼 사이냐? 시인 김광규는 사랑, 그것도 부부관계, 살림살이, 집을 달팽이에 빗대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마당이 있는 작은 단독주택에 살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모양새가 엇비슷하여 서울의 어느 외곽 변두리나 지방 소도시의 읍내의 번다한 길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는, 너무나너무나 비슷하여 찍어낸 듯 서로 닮은 꼴로 놓여 있는 집들.
시멘트를 이겨 바른 작은 마당과 그 한 가운데 있는 수도꼭지. 누런 양은 대야, 그리고 수도꼭지에 박혀있는 푸른 빛깔의 비닐 호스. 야트막하여 고개를 내밀면 옆집에서도 비슷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집들에 살았을 것이다.
봄비가 내린 어느 날 아침. 시인은 양치질을 하면서 문득 녹슨 대문 옆에 연탄광이자 장독대인 마당 앞뜰에서 서로 연약한 목울대를 비비고 섰을 두 마리 달팽이를 보았을 것이다. 아, 어제는 그리도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가 내렸건만 저 둘은 언제 만나서 저런 사랑의 몸짓을 나누게 되었을까? 서로의 집 앞에 세워진 빨간 우체통을 통해 사랑의 연서(戀書)를 주고 받았을까. 부모 몰래 마루에 놓인 전화 다이얼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사랑의 밀담을 나눴을까. 아니면 요새 사람들처럼 이 메일을 통해 서로의 알몸을 전송하였을까? 무선 핸드폰으로 某月某日某時에 시인 김광규 네 장독대 앞뜰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을까.
시인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시인은 아마 양치질을 하다 말고 '야, 저 놈들 봐라.'하면서 신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고, 인간을 생각했을 것이다. 명동 은성다방에서 처음 아내를 만나 쓰디쓴 커피 한 잔을 마주 놓고 처음 맞선을 보던 지금의 아내를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수줍게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았지만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당차게 대답하던 처녀시절의 아내. 말없이 설탕과 크림을 덜어 티스푼으로 저어 주던 다정한 손매를 기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두 마리 달팽이를 보면서 필경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하고 시인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에 놀라워하면서... 이제 시인은 자신의 집 한 칸을 마련한 가장으로서의 뿌듯함을 느끼기 시작한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첫 맞선자리에서 아내가 마음에 들었고, 아내도 수줍은 듯 뿌리치지 못할 뜨겁고 힘찬 손길이 좋았다.
두 사람은 명동을 걸어 남산 소월길을 거닐다 세검정 지나 아내의 집 앞 골목에서 벽을 등지고 숨찬 첫 키스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온양온천이나 경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여인은 남편이 시인이기 전에 남정네이고, 남편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것이다. 독서는 많이 했으나 세상 돌아가는 큰 일, 작은 일 속속들이 잘 헤아리는 인간이지만 바로 옆 제 아내의 속내는 모르고, 오늘 쌀독에 쌀이 떨어졌는지 청탁들어온 원고는 제때에 주었는지, 제때에 주었으면 제때 원고료는 들어오는 건지 세상일엔 속절없이 무감한 내 남편 말이다.
남편 역시 세상사 돌아가는 일에만 관심이었겠는가. 짐짓 생활의 어려운 형편 잘 참아주는 아내가 고마웠으나 아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이불 밑으로 따스하게 손 한 번 잡아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하는 다정다감하나 무뚝뚝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어느날 아내는 잠에서 깨어 남편이 밤새 두툼한, 그 뜨거운 손으로 자신의 손을 꾹꾹 눌러주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이런 소갈머리없는 남편을 쪼아대며 살림을 꾸렸을 것이고, 남편은 잘 가던 다방에 발길을 끊었고, 같은 동료 문인들과 세상 돌아가는 일을 한탄하며 나누던 소주집에서의 호기로운 술값 계산에 머뭇거렸을 것이다. 시인 부부는 그렇게 10년을 공들여 셋방 시절을 모면하고 드디어 그네들의 집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시인은 달팽이 두 마리의 사랑을 보면서 마침내 성서의 구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 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25-34절
시인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여 이 시를 지었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면 말구..... 흐흐. 시인의 시를 보면서 나를 구박하는 아내를 떠올린다. 넌 모르겠지만 난 잠든 너를 보며 눈물 짓는다.
-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이제 내년 4월이면 아내와 한집살이, 한몸살이 한 것이 만 4년이 된다. 서로 30여년 가차이 다른 환경, 다른 인생을 살아왔으나 우리는 또 얼마나 가깝고도 먼 사이냐? 시인 김광규는 사랑, 그것도 부부관계, 살림살이, 집을 달팽이에 빗대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마당이 있는 작은 단독주택에 살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모양새가 엇비슷하여 서울의 어느 외곽 변두리나 지방 소도시의 읍내의 번다한 길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는, 너무나너무나 비슷하여 찍어낸 듯 서로 닮은 꼴로 놓여 있는 집들.
시멘트를 이겨 바른 작은 마당과 그 한 가운데 있는 수도꼭지. 누런 양은 대야, 그리고 수도꼭지에 박혀있는 푸른 빛깔의 비닐 호스. 야트막하여 고개를 내밀면 옆집에서도 비슷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집들에 살았을 것이다.
봄비가 내린 어느 날 아침. 시인은 양치질을 하면서 문득 녹슨 대문 옆에 연탄광이자 장독대인 마당 앞뜰에서 서로 연약한 목울대를 비비고 섰을 두 마리 달팽이를 보았을 것이다. 아, 어제는 그리도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가 내렸건만 저 둘은 언제 만나서 저런 사랑의 몸짓을 나누게 되었을까? 서로의 집 앞에 세워진 빨간 우체통을 통해 사랑의 연서(戀書)를 주고 받았을까. 부모 몰래 마루에 놓인 전화 다이얼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사랑의 밀담을 나눴을까. 아니면 요새 사람들처럼 이 메일을 통해 서로의 알몸을 전송하였을까? 무선 핸드폰으로 某月某日某時에 시인 김광규 네 장독대 앞뜰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을까.
시인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시인은 아마 양치질을 하다 말고 '야, 저 놈들 봐라.'하면서 신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하고, 인간을 생각했을 것이다. 명동 은성다방에서 처음 아내를 만나 쓰디쓴 커피 한 잔을 마주 놓고 처음 맞선을 보던 지금의 아내를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수줍게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았지만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당차게 대답하던 처녀시절의 아내. 말없이 설탕과 크림을 덜어 티스푼으로 저어 주던 다정한 손매를 기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두 마리 달팽이를 보면서 필경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하고 시인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에 놀라워하면서... 이제 시인은 자신의 집 한 칸을 마련한 가장으로서의 뿌듯함을 느끼기 시작한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첫 맞선자리에서 아내가 마음에 들었고, 아내도 수줍은 듯 뿌리치지 못할 뜨겁고 힘찬 손길이 좋았다.
두 사람은 명동을 걸어 남산 소월길을 거닐다 세검정 지나 아내의 집 앞 골목에서 벽을 등지고 숨찬 첫 키스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다. 온양온천이나 경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여인은 남편이 시인이기 전에 남정네이고, 남편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것이다. 독서는 많이 했으나 세상 돌아가는 큰 일, 작은 일 속속들이 잘 헤아리는 인간이지만 바로 옆 제 아내의 속내는 모르고, 오늘 쌀독에 쌀이 떨어졌는지 청탁들어온 원고는 제때에 주었는지, 제때에 주었으면 제때 원고료는 들어오는 건지 세상일엔 속절없이 무감한 내 남편 말이다.
남편 역시 세상사 돌아가는 일에만 관심이었겠는가. 짐짓 생활의 어려운 형편 잘 참아주는 아내가 고마웠으나 아내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이불 밑으로 따스하게 손 한 번 잡아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대신하는 다정다감하나 무뚝뚝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어느날 아내는 잠에서 깨어 남편이 밤새 두툼한, 그 뜨거운 손으로 자신의 손을 꾹꾹 눌러주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이런 소갈머리없는 남편을 쪼아대며 살림을 꾸렸을 것이고, 남편은 잘 가던 다방에 발길을 끊었고, 같은 동료 문인들과 세상 돌아가는 일을 한탄하며 나누던 소주집에서의 호기로운 술값 계산에 머뭇거렸을 것이다. 시인 부부는 그렇게 10년을 공들여 셋방 시절을 모면하고 드디어 그네들의 집을 구입했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시인은 달팽이 두 마리의 사랑을 보면서 마침내 성서의 구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 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태복음 6:25-34절
시인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여 이 시를 지었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면 말구..... 흐흐. 시인의 시를 보면서 나를 구박하는 아내를 떠올린다. 넌 모르겠지만 난 잠든 너를 보며 눈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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