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좌 등대
- 조정
걸어서 물 위로 오 리쯤 가는 길에 그가 있다
고집 센 사랑니처럼
별 쓸모도 없는
안도나 휴식이나 평화나 위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면
주전자에 물 끓여놓고
그와 마주 보는 창가에 차까지 한 통 내려놓고
앉지 말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빚진 여자처럼 그 앞에 앉는다
그는 빚이 없다
아쉬울 때만 저를 알은체하는 배들을 위해
밤마다 불을 켜고
나팔을 부우우 불어 다 갚았다
* 조정, 이발소 그림처럼, 실천문학, 2007
좋은 시는 가만히 앉아서 천리를 보여준다.
사방이 어둡기만 한 10월의 마지막 밤에
나는 안좌등대 옆에 있다.
그는 지금도 부우우 나팔을 불고 있다.
아쉬울 때만 저를 알은 체 하는 배들을 위해
그는 이 밤도 쉴새없이 눈알을 굴린다.
알고 있는가?
사랑도 저와 같아서 아쉬울 때만 사랑이다.
그걸 알면서도 빚진 여자처럼 등대 옆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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