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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2002 한·일 월드컵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 이유

2002 한·일 월드컵 개최가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국민들 사이에서 월드컵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며 괜한 걱정을 하고 있지요. 사실 국민들 중 누가 월드컵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그것의 성공적인 개최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등등에 대해서 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월드컵 기간 중 차량 2부제를 강제 실시하고, 그것을 위반할 경우엔 과태료 5만원을 부과한다는 사실 같은 것은 아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세계인의 행사라고 하는 월드컵 개막식이 우리나라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지난 올림픽을 경험한 우리들로서는 국가의 위신과 외국에서의 우리나라에 대한 평가를 개선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일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갑자기 중학교 때 일이 생각납니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있던 사회 수업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죠.

"86, 88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거기에 투입되는 재원으로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를 줄이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는 일부 목소리가 있다. 너희들 중 우리나라의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봐라."

아이들이 조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들었죠. 아, 불행히 저도 그때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면서 반대하는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고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아마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대표해서 국력을 기울여야만 치를 수 있는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할 때는 국민들과 충분한 사전협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사 개최가 결정된 지금에 와서 반대한다, 안 한다고 말하는 것은 때늦은 후회일지는 몰라도 국민들과 아무런 협의 없이 국민의 세금으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뭐, 대충 그런 류의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아마도 이 무렵 배우기 시작한 세계사 시간에 공부한 "대표없이 세금없다."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구호에 감명받았던 어린 마음이 이를 주체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 덕분에 저는 사회 선생님에게 완전히 찍혀버렸죠.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나 이제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지만 월드컵 개최와 관련해서 국민의 의견을 물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세금을 내지 않는 중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왕창 세금을 물면서 살고 있는 월급쟁이가 되었으니 이런 말할 자격은 충분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국민적 합의 없이 개최되는 월드컵 행사가 국민들에게 뜨거운 분위기로 환영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이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월드컵이 개최된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또다시 실눈을 뜨고 째려보는 상황이 재연되려고 합니다. 전에는 날씨가 이렇게 가물었는데 파업한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파업한다고 공격하더니 이제는 월드컵이 개최되는 상황이라 안 된다고 하니.

이래저래 저 같은 노동자들은 억울합니다.

노동자와 월드컵 행사

축구는 축구장에서 경기를 직접 관전하면서 함께 고함을 지르고, 자국의 국가대표를 응원할 때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국민학교 6학년 때 해태 타이거스와 어느 팀인가와의 프로 야구 경기를 단 한 차례 그것도 외야석에서 관람해본 경험밖에 없는 저로서는 그 재미가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아마도 모두가 하나라는 그런 든든한 연대감이 경기장을 직접 찾는 이들의 감정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들 모두가 하나로 묶이는 기분이 들 겁니다. 앤디 워홀(Andy Warhol) 같은 이는 이런 대중사회(mass society)의 도래를 영국 여왕도 부둣가의 노동자도 똑같이 TV를 즐기고, 코카콜라를 마시는 사회라고 말했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대중사회의 본질을 말한 것일까에 대해서 저는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노동자 혹은 샐러리맨들이 월드컵을 즐길 준비는 다 되어 있는 걸까요. 우선 월드컵 입장권 가격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기:         1등석/ 2등석/ 3등석
개막전 : 550,000원 / 275,000원/ 165,000원
조예선전:165,000원/ 110,000원/ 66,000원
16강전: 247,500원/ 192,500원/ 110,000원
8강전: 330,000원/ 220,000원/ 137,000원
준결승전: 550,000원/ 330,000원/ 192,500원
3.4위전: 247,500원/ 192,500원/ 110,000원


가장 비싼 좌석권은 550,000원이고 가장 싼 좌석의 가격도 66,000원에 이릅니다. 평생 한 번 볼까말까한 세계인의 축제에 참석하는데 그깟 50만원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좋습니다. 운이 좋아서 당신에게 월드컵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이 생겼습니다. 모든 문화행사가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은 여가를 즐기는 일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런 여가를 즐길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을까요. 다음의 통계를 한 번 보도록 하죠. OECD가입국 중 이번 월드컵에도 참가하고 우승 후보로도 꼽히는 독일, 프랑스의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1년에 1,300 - 1,600시간대입니다. 부지런하다는 독일인들이 일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연간 2,474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파트 타임 노동자를 포함한 시간이므로 이를 다시 취업 노동자의 노동시간으로 환산하면 2,628시간이 됩니다. GDP(국내총생산) 규모 세계 13위라는 우리나라 경제 수준에서 유럽의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두 배 가량 더 일하는 셈입니다. ILO(국제노동기구)의 통계로 보면 비교대상국 75개국 중에서 상위 5위 안에 드는 노동강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10여명의 노동자가 장시간 과로와 고강도 노동으로 인해 사망하고 있고, 매일 2백여명의 노동자가 큰 부상을 당하고 산업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자, 바야흐로 단군이래 최대의 부를 누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은 '오늘도 무사히'입니다. 다행히 노동자들도 월드컵에 동참하여 월드컵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내 돈 내고라도 맘 편하게 관전하고 싶다고 해서 내건 구호가 바로 '주5일 근무제'인 거죠.

그런데 정부는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공권력 확립 방침에 따라 집회·시위 과정의 불법 행위에 엄정 조처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래저래 월드컵 분위기가 살아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게다가 월드컵이 아무리 국제 행사라 한들 그것도 다 우리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월드컵과 FIFA가 무슨 초헌법적 기관도 아닌데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기본권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비상 대권이라도 가진 양 으스대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닐런지요.

노동자들도 월드컵을 맘 편하게 구경하고 싶습니다. 2001년 들어 매주 5명 정도의 노동자가 구속되었고, 최근엔 국가기간산업 매각과 관련하여 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수배, 구속되고 있습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세계인들이 과연 우리나라의 보신탕 문화만 뭐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의 보신탕 문화에 대한 그들의 사소한 논평에는 펄쩍 뛰는 여러분과 저, 그리고 정부. 우리들은 어째서 세계 각국의 언론들이 단병호 민주노총위원장을 비롯한 구속노동자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는 못 들은 척 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번 월드컵 대회 기간동안 정상근무를 합니다. 월드컵 개최도시에서 사는 죄로 그 동안 출퇴근 때 이용하던 제 낡은 프라이드를 두고, 다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1시간이 넘는 출퇴근을 해야겠지요. 이런 개인적인 불편쯤 감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올림픽이든, 월드컵이든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국제적인 행사를 유치하고자 할 때는 지금처럼 급작스럽게 유치위원회를 결성해 급하게 행사를 유치해오고는 한 건했다는 식으로 자랑하지 말고,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세금 내야하는 국민들을 설득하는 공청회라도 한 번 개최해주길 바랍니다. 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없이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인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없이 우리 노동자들이 맘 편하게 그들의 여가를 즐기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5일 근무제를 조속히 시행해주길 바랍니다. 그래야 월드컵 맘 편하게 구경할 거 아닙니까.<200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