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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고은 - 하루

하루

- 고 은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루가 저물어
떠나간 사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오 하잘것없는 이별이 구원일 줄이야

저녁 어둑밭 자욱한데
떠나갔던 사람
이미 왔고
이제부터 신이 오리라
저벅저벅 발소리 없이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아름답구나

*

아침 출근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별한 뒤엔 사람이 달라진다.
보이지 않던 것들, 보이지 않던 소리들,
보이지 않던 사람들,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죄다 안아달라고 달려든다.

늙어서 더이상 이별할 것이 제 목숨 밖에 없는 사람도
이별을 구원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삶에서 이별은 불가피(不可避)한 것이다.
불가피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만
이 말의 의미가 강렬하면 할수록
가능한 한 피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또 얼마나 강렬한 것인가.

발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신은 어쩌면 세월의 풍상이다.
이별할 시간이 다가오면 문득 세상은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던
모든 것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존재하던 것의 갑작스런 부재는 낯설다.
우리는 모두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
아무도 죽음을 두 번 경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죽음은 낯설다.
그러나 우리는 이별을 통해서 죽음을 미리 체험한다.
기억에도 없다면 부재하는 존재이건만
우리는 사소한 이별의 경험으로 죽음을 알게 된다.

이별은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의미다.
이별 뒤에 열린 새로운 세상 앞에서
부재하는 이를 기억하는 것은 다행한 일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미리부터 조상하는 일인가.



오 하잘것없는 이별이 구원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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