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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최금진 - 끝없는 길, 지렁이

끝없는 길 - 지렁이


- 최금진


꿈틀거리는 의지로

어둠속 터널을 뚫는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 믿으며
흙을 씹는다
눈뜨지 않아도 몸을 거쳐 가는 시간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인데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나올까
무너진 길의 처음을 다시 만나기라도 할까
잘린 손목의 신경 같은 본능만 남아
벌겋게 어둠을 쥐었다 놓는다, 놓는다
돌아보면 캄캄하게 막장 무너져 내리는 소리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누군가 파묻은 탯줄처럼 삭은
노끈 한 조각이 되어
다 동여매지 못한 어느 끝에 제 몸을 이어보려는 듯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최금진, 『새들의 역사』, 창비, 2007


*

내일모레 내 나이 마흔. 사회적인 까닭이겠지만 남자의 마흔은 최승자가 노래한 여자의 서른과 흡사하리라. 순수한 의미에서 해외여행 한 번 못 가봤다. 일 년 열두 달 일이 아닌 다른 이유로 놀러가는 일을 해본 기억이 없다. 내 나이 스물여섯에 시작한 직장생활이 서른아홉고개에 다다르는 동안 나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폐허다.

최금진의 시로는 첫 대면인데 나쁘지 않다. “덧난 상처가 다시 가려워지는 쪽이 길이라고”라는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갑내기 시인의 비루한 인생행로가 느껴진 탓이라고 해두자. 공(空)하고, 허(虛)하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지렁이의 행보는 앞을 보면 장벽이요, 되돌아보면 제 몸으로 씹어 삼킨 흙들이 뚫어낸 빈 구멍만 남으니 허허로울 수밖에 없는 몸짓이지 않은가. 암중모색(暗●中●摸●索)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이대로 멈추면 여긴 딱 맞는 관짝”
이다. 지금 내 삶은 고스란히 내가 만든 것이다. 안성맞춤으로. 아니 갈 수도, 되돌아 갈 수도 없으니 그것이 삶이다. 그러므로 “앞도 뒤도 없고 후퇴도 전진도 없다”


지렁이가 간다, 꿈틀꿈틀

어둠에 血이 돈다.


마지막이 그럴듯하다. 명구(名句)다. 지렁이가 간다. 암흑 속으로, 어둠 속으로, 흙바닥 속으로, 삶 속으로, 꿈속으로, 마음속으로. 삶이 왜 부조리하겠는가? 시지프스는 왜? 다시 굴러 떨어질 돌을 올리는 일을 반복하겠는가? 그것이 삶이다. 멈추면 제 한 몸 뉘일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자리. 지렁이가 꿈틀하는 순간, 지렁이가 토해낸 흙으로 먹고 사는 인간들은 몰라도 지구는 함께 부르르 떨지 않을까. 어둠에 전해진 지렁이의 붉은 몸이, 붉은 길이 지구의 혈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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