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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고정희 - 쓸쓸한 날의 연가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장
그려지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간절하다 새벽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는
아직 그대 기다린다 저녁편지를 쓰네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네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


시인 고정희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민족시인, 지리산, 여성의 자의식 등등 여러가지가 떠오르겠지만 난 시인 고정희 하면 무엇보다 먼저 쓸쓸함의 정조가 우선 떠오른다. 마치 잔잔하게 흘러가는 냇가에 우연히 기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고정희 시인의 시에서는 쓸쓸하지만 흘러가는 내내 오랫동안 반사되는 기름 한 방울의 반짝임이 있다. 때때로 기름 한 방울의 쓸쓸함은 매우 얕은 느낌이지만 동시에 지리산의 모든 냇물을 불러모아도 쉽사리 씻어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고정희의 <쓸쓸한 날의 연가>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천석고황(泉石膏肓)"이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중국 당(唐)나라 때의 전유암(田游巖)이라는 은사(隱士)는 비록 숨어살았지만 덕이 높은 이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기산에 은거하며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내려 했지만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다. 한 번은 당 고종이 숭산(嵩山)에 갔다가 그가 사는 곳에 들러 "선생께서는 편안하신가요"라고 안부를 물었는데, 이때 전유암은 "신은 샘과 돌이 고황에 걸린 것처럼, 자연을 즐기는 것이 고질병처럼 되었습니다(臣所謂泉石膏肓, 煙霞痼疾者)"라고 대답하였다는데서 "천석고황"이 유래하게 되었다.

고황(膏肓)이란 심장과 횡격막 부위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는데, 병이 이곳까지 미치면 당대의 의학으로는 치료할 수가 없었으므로 불치의 병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전유암은 홍진을 벗어나 자연을 벗삼아 살아간지 오래 되었으므로 조정과 임금이 불러도 출사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불치병에 비유한 것이다. 시인 고정희는 자신의 외로움이 흉곽에 새겨진 지도와 같다고 말한다. 마치 고황과 마찬가지로 씻어낼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처치곤란의 증세이다.

그런 날이면 시인은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봄여름가을겨울, 갈비뼈와 간에 들고나는 외로움으로 그대를 기다린다고 저녁편지를 쓴다. 시인이 말하는 그대가 누구일지는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겠지만 시인이 쓰는 편지는 당연히 시(詩)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는 시인의 편지를 받아 읽게 될 독자일 수도 있다. 시인은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그때마다 시인에게 전해지는 건 답장이 아니라 한 장의 기차표다.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누가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한 세상 잘 지나가시라고 누군가 내민 기차표 한 장이다. 마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다는 편지에 등장하는,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기차처럼 시인 고정희에게 죽음은 외로움 만큼이나 친숙한 존재였으리라.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단다는 것이지."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시인은 책상 위에 놓인 기차표 한 장을 들고,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그 세계로 날아갔다. 그녀의 책상 위에 답장 대신 기차표 한 장을 남겨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나 화가나 그들의 예술을 완성시키는 것은 '그대'들이 선사하는 외로움과 절망일지도 모르겠다. 슬픔과 외로움을 짊어진 채 어서 가라고 등 떠미는 잔인한 그대들...

- 빈센트 반 고흐, 포플라나무,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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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2010.11.07 13:06

    저는 오랫동안 문정희 시인과 고정희 시인을 헷갈렸습니다. 참 어처구니 없지요.
    오늘도 편집장남의 '천석고황(泉石膏肓)'을 듣고 문정희 시인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갈비뼈에 철썩이는 외로움"을 지닌 고정희 시인 또한 '박힌 별'을 가지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 windshoes 2010.11.07 13:37 신고

      개인적으로 문정희 시인의 작품들도 좋아합니다.
      어쩌다보니 대학에서 문 시인의 딸과 동기동창으로 같이 공부하기도 했군요.(특별히 말을 걸어본 적은 없지만서도...)^^

      그런데 편집장, 편집장 하시니 어쩐지 기분이 묘합니다.
      회사 밖의 사람에게서 그런 호칭으로 불려본 경험이 별로 없는 탓인가 봅니다. 대부분은 그냥 '바람구두' 혹은 '구두'라 부르거든요. ^^

  • 2010.11.08 01:06

    예, 알겠습니다. 구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