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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강은교 - 사랑법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진부(陳腐)하다"는 말이 있다. 케케묵고 낡았다는 뜻이다. "늘어놓을 진"에 "썩을 부"를 쓴다. 두 글자 모두 "묵은"이란 뜻이 있다. 가령, 내가 누군가와 10년을 사귀었다면 그는 나에게 오래 "묵은" 사람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부한 사람이다. 강은교 시 <사랑법>을 오늘의 관점에서 읽으면 다소 진부해 보인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라는 첫 연은 이 시의 유명세만큼이나 낯익다. 낯익어서 진부해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고 반문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오랜 시간을 두고 이어져 내려온 고전이란 것들을 읽지 않고 미리부터 아는 척 하는 이들을 쉽사리 만날 수 있다. 남들이 읽어 버린 독후감, 시평, 비평들을 손쉽게 얻어 읽을 수 있는 "복제의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가 직접 해내지 않고서는 우리 것이 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사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 진부해진다. 썩은 것들, 낡은 것들을 늘어놓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스스로에게 아첨하고 아양 떨 때 그 사람은 진부하다.

강은교 <사랑법>이 진부하다면 먼저 이 시를 먼저 제 가슴 열어젖히고 처절하게 읽어볼 각오를 먼저 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음 연을 보자.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리고 "실눈으로 볼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손쉽게 하는 말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단지 첫 연의 낯익음에 홀려 나머지 구절들을 쉽게쉽게 넘기는 사람은 시인이 마지막에 가서 툭하고 던져놓은 저 무서운 말을 흘려버리게 된다.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는 이 놀라운 발언을 하기 위해 시인은 각 연의 첫 행을 둘씩 겹치게 해서 교묘한 리듬 속에 쉽게 읽어내려가는 느낌을 독자로 하여금 갖게 한다.  1연의 1,2행은 "떠"로 3,4행은 "잠" , 2연은 모두 "또"로 시작된다. 5연의 첫 3행은 모두 "쉽"으로 시작하고 있다. 마치 운을 떼듯 그렇게 편하게 놓인 듯 보이는 시이지만 이 시가 지닌 힘과 파괴력은 결코 작지 않다. 아니, 앞 부분들이 쉽기 때문에 제 힘으로 연구해 가며 읽은 독자라면 마지막 연이 주는 묵직한 깨달음에 고개 숙이게 된다. 7연에서는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이라고 1연이 동어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이 때 가장 중요한 시어는 "홀로"가 된다.

"홀로가고, 홀로 잠든다." <중용(中庸)>에는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니라.(숨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미함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군자는 그 홀로 삼가는 것이니라.)" 란 말이 있다. "가장 큰 하늘이 우리 등 뒤에 있다"는 강은교 시인의 말을 나는 "신독"으로 해석해 본다. 우리는 누구라도 속일 수 있지만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가장 큰 하늘은 우리 등 뒤에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사랑하든 타인을 사랑하든 사랑은 "서둘지 말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실눈(비판적인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법일 테니까....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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