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모종을 하면서
- 오탁번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구말구 아뻐 꼬추도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커질 때가 있단다 개구장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구슬소리 영롱하게 짤랑대면서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조그만 우리집 꽃밭에 봉숭아 꽃모종을 하려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
오탁번 선생의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한참동안 흐뭇하게 웃었다.
오탁번 선생의 사뭇 근엄해보이는 표정이 떠올랐고, 당신의 시풍과는 완연히 달라보이는 이 시 한 편이 갑자기 꼬추를 까 내리고 아버지 앞에 마주선 어린 아들의 표정이 보일 것처럼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종종 시에는 삶의 번잡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시선과 마주대할 때면 나는 영 난감해진다.
삶은 하찮게 보면서 죽음을 찬미하는 시선.
개인은 어느 순간에라도 존중 받아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한 집단 역시 각각의 개인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은 망각하는 시선이 난 부담스럽고, 영 위태로운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글쎄, 어려서부터 뭔가 비장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강요받는 근엄한 교육을 받아온 탓일까?
특별히 나만 경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내 나이 17살 무렵의 나는 독실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제법 착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나에게 세례를 준 신부님은 아일랜드 출신의 머리에 흰서리가 빼곡하게 내려앉은 분이었다. 이 분은 자위행위에 대해서는 정말 지독하리만치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률을 설파하는 분이었는데, 나는 그로인해 오랫동안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담과 이브 시절에 남녀가 벌거벗고 공공연히 섹스를 할 때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을까? 이제사 고백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 시절에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정말 수십억의 불쌍한 정자들을 의미없이 도륙하는 살인행위에 근접하는 일이라고 느꼈었다. 그런데 하루에도 열두번씩 염치없이 골이 나는 이놈의 성기를 어찌하냔 말이다.
아, 성교육 강사들이 이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나가서 뛰라는 거다. 다른 말로 성기로 쏠리는 에너지를 소모하란 말씀이렸다. 그런데 달릴 때 트레이닝복에 쓸리기만 해도 이놈의 몸 속 에너지는 제대로 소모되기는 커녕 온통 거시기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얇은 트레이닝복 앞으로 비죽 솟아오른 이놈 때문에 달리는 것이 너무 부끄러울 지경이 되었다. 어차피 의학적으로는(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정낭에 정액은 일정한 시점에 이르면 자동으로 소멸되거나 분출되기 마련이다. 몽정(夢精)을 인큐버스(incubus) 혹은 써큐버스(succubus)와 같은 몽마(夢魔)의 장난으로 보지 않는 한 그것이 과학적이고, 의학적으로 맞는 일인데도 나는 아직 그것까지는 잘 모르던 때라 시도때도 없이 골나는 이놈을 정말 돌로 때려줄 생각까지 해봤다. 스스로를 색정광, 사티리아시스(satyriasis)가 아닌가 한 적도 있었으니 그로 인한 나의 죄책감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말하려니 지금 도리어 부끄러워진다.
나중에 알고보니 주변의 다른 놈들은 하루에 자위 행위를 몇 번이나 할 수 있다. 자신이 쏘아올린 정액이 벽천장에 들러붙었다는 식의 음담패설을 농으로 주고 받고 있었으니 나는 정말 이에 대해 무지몽매한 자였던 거다.
언제부턴가 성은 깊은 장농 속, 깊은 밀실 속으로 숨어버렸다. 역전에 가면 쎄고 널린 것이 러브호텔이고, 밤낮없이 그곳 주차장에는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차들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세상은 온갖 근엄한 표정으로 이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몰아간다. 한국에서온 노인네들이 미국 어린이 보고 '아유, 귀엽다' 고추 한 번 만졌다고 어린이 성폭행범으로 구속수감된다고 - 그렇다고 어린이 성학대 문제에 대해 관대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 미국 사회가 우리보다 성에 대해 안전한 사회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탁번 선생의 이 시 <꽃 모종을 하면서>란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꽃 모종을 하듯 우리의 일상 속에서의 성을 밝은 곳으로 꺼내 놓자고. 성을 사망과 음란이 가득한 음침한 골짜구니에 가둬둔 채 저들만 즐기는 그런 비루한 짓거리로 전락시키지 말자고.
- 오탁번
따뜻한 봄날 꽃밭에서 봉숭아 꽃모종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개구장이 아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다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모종삽을 든 채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빠 아빠 쉬도 마렵지 않은데 왜 예쁜 여자애를 보면 꼬추가 커지나? 아들은 바지를 까내리고 꼬추를 보여주었다 정말 꼬추가 아주 골이 나서 커져 있었다
꼬추가 커졌구나 얼른 쉬하고 오너라 생전에 할머니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자에게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나 나는 목이 메었다 손자의 부자지를 쓰다듬으시던 할머니는 무너미골 하늘자락에 한 송이 산나리꽃으로 피어나서 지금도 손자의 골이 난 꼬추를 보고 계실까
오줌이 마렵지 않은데 예쁜 여자애 알아보고 눈을 뜬 내 아들의 꼬추를 만져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럼 그렇구말구 아뻐 꼬추도 오줌이 마렵지 않아도 커질 때가 있단다 개구장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구슬소리 영롱하게 짤랑대면서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조그만 우리집 꽃밭에 봉숭아 꽃모종을 하려고 나는 다시 허리를 구부렸다
*
오탁번 선생의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한참동안 흐뭇하게 웃었다.
오탁번 선생의 사뭇 근엄해보이는 표정이 떠올랐고, 당신의 시풍과는 완연히 달라보이는 이 시 한 편이 갑자기 꼬추를 까 내리고 아버지 앞에 마주선 어린 아들의 표정이 보일 것처럼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종종 시에는 삶의 번잡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시선과 마주대할 때면 나는 영 난감해진다.
삶은 하찮게 보면서 죽음을 찬미하는 시선.
개인은 어느 순간에라도 존중 받아야 한다고 부르짖으면서 한 집단 역시 각각의 개인이 모인 것이라는 사실은 망각하는 시선이 난 부담스럽고, 영 위태로운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글쎄, 어려서부터 뭔가 비장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강요받는 근엄한 교육을 받아온 탓일까?
특별히 나만 경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내 나이 17살 무렵의 나는 독실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제법 착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나에게 세례를 준 신부님은 아일랜드 출신의 머리에 흰서리가 빼곡하게 내려앉은 분이었다. 이 분은 자위행위에 대해서는 정말 지독하리만치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률을 설파하는 분이었는데, 나는 그로인해 오랫동안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담과 이브 시절에 남녀가 벌거벗고 공공연히 섹스를 할 때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을까? 이제사 고백하는 것이지만 나는 그 시절에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정말 수십억의 불쌍한 정자들을 의미없이 도륙하는 살인행위에 근접하는 일이라고 느꼈었다. 그런데 하루에도 열두번씩 염치없이 골이 나는 이놈의 성기를 어찌하냔 말이다.
아, 성교육 강사들이 이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나가서 뛰라는 거다. 다른 말로 성기로 쏠리는 에너지를 소모하란 말씀이렸다. 그런데 달릴 때 트레이닝복에 쓸리기만 해도 이놈의 몸 속 에너지는 제대로 소모되기는 커녕 온통 거시기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얇은 트레이닝복 앞으로 비죽 솟아오른 이놈 때문에 달리는 것이 너무 부끄러울 지경이 되었다. 어차피 의학적으로는(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정낭에 정액은 일정한 시점에 이르면 자동으로 소멸되거나 분출되기 마련이다. 몽정(夢精)을 인큐버스(incubus) 혹은 써큐버스(succubus)와 같은 몽마(夢魔)의 장난으로 보지 않는 한 그것이 과학적이고, 의학적으로 맞는 일인데도 나는 아직 그것까지는 잘 모르던 때라 시도때도 없이 골나는 이놈을 정말 돌로 때려줄 생각까지 해봤다. 스스로를 색정광, 사티리아시스(satyriasis)가 아닌가 한 적도 있었으니 그로 인한 나의 죄책감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말하려니 지금 도리어 부끄러워진다.
나중에 알고보니 주변의 다른 놈들은 하루에 자위 행위를 몇 번이나 할 수 있다. 자신이 쏘아올린 정액이 벽천장에 들러붙었다는 식의 음담패설을 농으로 주고 받고 있었으니 나는 정말 이에 대해 무지몽매한 자였던 거다.
언제부턴가 성은 깊은 장농 속, 깊은 밀실 속으로 숨어버렸다. 역전에 가면 쎄고 널린 것이 러브호텔이고, 밤낮없이 그곳 주차장에는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차들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세상은 온갖 근엄한 표정으로 이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몰아간다. 한국에서온 노인네들이 미국 어린이 보고 '아유, 귀엽다' 고추 한 번 만졌다고 어린이 성폭행범으로 구속수감된다고 - 그렇다고 어린이 성학대 문제에 대해 관대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 미국 사회가 우리보다 성에 대해 안전한 사회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탁번 선생의 이 시 <꽃 모종을 하면서>란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꽃 모종을 하듯 우리의 일상 속에서의 성을 밝은 곳으로 꺼내 놓자고. 성을 사망과 음란이 가득한 음침한 골짜구니에 가둬둔 채 저들만 즐기는 그런 비루한 짓거리로 전락시키지 말자고.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정희 - 쓸쓸한 날의 연가 (3) | 2010.11.07 |
---|---|
강은교 - 사랑법 (1) | 2010.11.07 |
김명인 - 베트남1 (0) | 2010.11.07 |
이하석 - 버려진 병 (0) | 2010.11.06 |
김형영 - 지는 달 (0) | 2010.11.06 |
최두석 - 달래강 (0) | 2010.11.05 |
조은 - 동질(同質) (2) | 2010.11.04 |
이성복 - 세월에 대하여 (2) | 2010.11.04 |
문인수 - 바다책, 다시 채석강 (0) | 2010.11.03 |
천상병 - 내가 좋아하는 여자 (0) | 2010.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