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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형영 - 지는 달

지는 달


- 김형영(金泂榮)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캄캄한 하늘에
저리 밀리는 구름떼들 데리고
우짖는 草木 사이에서
이제 지는 달은
6천 만 개 눈 깜짝이는 바람에
다시 뜨리니

누가 이 세상 벌판에 혼자 서서
먼 草木 새로 지는 달을
밝은 못물 건너듯 바라보느냐
4월 초파일
절간에 불 켜지듯 바라보느냐

한 해에도 가장 캄캄한 밤에
우리 모두 바라보는 사람들,
바라보는 눈길마다
지난 날은 되살아 머뭇거리다가
멀리 사라진다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김형영,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6, 문학과지성사, 1979>

*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앞 뒤를 같은 구절로 끝맺는 시를 수미상관(首尾相關)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처음과 끝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뜻인데 모두 4연의 이 시에서 마지막 연의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는 앞의 3연이 모두 7행, 5행, 5행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단 한 행으로 1연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에서의 행갈이는 호흡(리듬)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고 연갈이는 이미지의 이어짐, 혹은 시적 정황과 관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연은 단 1행이라 할지라도 시인으로서는 앞의 3연이 담고 있는 내용과 맞먹을 만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1연에서 시인은 "지는 달"의 이미지에 대해 시인은 "아름담다", "구름떼"와 "초목" 사이에서 "6천 만 개"의 눈이 깜짝이는 바람에 다시 뜨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을 깜짝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건 기대와 갈망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6천 만 개일까? 그 숫자는 단순한 과장일 수도 있고, 당시 한반도의 인구 수에 비례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6천 만 개의 눈 깜짝임으로 다시 뜬다. 지는 달은 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뜨는 존재이고, 지는 달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뜰 것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달이 지고 나서 영영 사라진다면 아름답다고 여기기 보다는 뭔가 비장해지겠지요. 가령, 일본인들이 매화가 일제히 피었다가 지는 순간을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여긴다면 우리네들에겐 그런 자연의 순환이 아름다운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연에서 시인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밝은 못물 건너듯, 절간에 불 켜지듯" 바라보는 이가 누구냐?고 묻지요. 달은 지지만 그것은 "새로"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로"란 것은 순환을 강조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희망과 기대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요. 지난 날은 그렇게 머뭇거리면서 지는 달과 함께 머뭇거리다 사라지는 겁니다. 과거를 묻어버리잔 의미라기 보다는 출발에 방점이 찍혀 있지요. 그래서 시인은 앞연 첫행에서 그리고 마지막연에서 다시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다"고 강조하는 모양입니다. 한 해에도 가장 캄캄한 밤에 우리 모두는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매일같이 지는 달을 볼 겁니다. 과연 지는 달을 밤새워 보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달이 지는 걸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달은 해처럼 명확한 포즈(노을과 같이)를 취하며 사라지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이 시의 재미 중 하나는 모두가 "지는" 달이란 말에서 마치 넌센스 퀴즈처럼 당연히 "꽃이 진다", "해가 진다", "날이 저문다"와 같은 일종의 서글픈 연상을 하겠지만 "달이 지면 해가 뜬다"는 간단하지만 이 시에서 묵직한 울림을 지닌 깨달음이 되는 것이죠. 시라는 것이 무엇가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묵직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아쉬움이 남겠지만 시란 사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렇듯 우리가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는 세계에 균열을 주는 것이겠지요. 그 균열은 때로 크고, 때로 미약하게 스쳐가지만 생각외로 오래 남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지는 달은 아름답습니다."

모호한 부분들은 독자의 몫이지요. 해석하기 나름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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