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야만 사이의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
『진보와 야만』을 읽기 전에 들었던 두 가지 생각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책 『진보와 야만-20세기의 역사』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보와 야만'이란 시선으로 20세기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태적 관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파헤쳤던 『녹색세계사』(2003, 그물코)를 통해 인류의 환경파괴 역사를 진지하게 담아냈던 저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아마 서유럽과 북미의 잘사는 나라들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뒤이어 그는 “이들과 그 가족들의 경험은 20세기에 세계 대다수 인구가 겪은 전형적인 경험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은 2000년에도 여전히 가장 부유했고(이 집단 안에서 일정한 변동이 있었지만), 최빈국들도 대체로 변함이 없었다. 실제로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부의 격차는 20세기 동안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1900년에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은 주변부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약 3배 더 부유했다. 1990년대 말에 이 격차는 7배로 커졌다. 어떤 경우에 그 격차는 개괄적인 수치가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1990년대에 미국의 1인당 소득은 자이르보다 평균적으로 80배 더 높았다. 많은 나라에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89개국 사람들이 1980년대 보다 훨씬 더 가난해졌고, 43개국 사람들이 1970년대 보다 더 가난해졌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부의 하락이었다. … <중략> … 20세기 말 세계에서 부의 격차는 막대했다. 세계 인구의 가장 가난한 20%(약 12억 명)는 세계 총소득의 채 1%도 차지하지 못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기준에서 ‘극빈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충분한 식량과 주택, 음용수도 공급받지 못했다. 세계 어린이의 1/3이 영양결핍을 분류되었고, 그 중에서 1,200만 명의 5세 이하 어린이가 빈곤 관련 질병, 대개는 13펜스의 비용밖에 들지 않는 경구용 수액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 <본문 155-156쪽>
이 책을 읽는 우리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가 상정하고 있는 서구 세계, 중심부의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과는 또 다른 경험들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1900년대 가장 가난했던 나라에서 탈출해 중심부에 근접하는 위치까지 올라섰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20세기 전반에 걸쳐 최소한 평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훨씬 더 부유해지는 진보를 이루었지만, 문제는 세계의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 부의 80%를 향유한다는 이 사실이 20세기의 가장 큰 야만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IMF 이후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난리를 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는 국민소득 상위 20%에 든다.
진보와 야만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건국 당시(1948년)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였던 최빈국에서 2006년 현재 16,000달러에 육박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문제는 이 같은 통계나 외형적 수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주변부 국가들보다 잘 살고 있다는 객관적 조건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른 중심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역시 경제위기와 실업을 완화하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이란 정책은 펼쳐보지도 못했다. 우리들 모두는 좀더 많은 소비를 위해 충실한 노동중독자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다.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더욱더 각박해졌고, 지금껏 피땀 흘려 누려온 모든 풍요가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우리에게 이 같은 공포와 불안이 더욱 극대화된 까닭은 우리의 성공과 풍요가 불과 최근 2~30년 사이의 일이라는 단기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라는 착취의 먹이사슬에서 우리들 역시 하나의 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주변부에 속한 인류가 채 1%도 안 되는 소득으로 비탈진 삶을 살아가더라도 오늘의 우리는 풍요로운 소비를 만끽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서구의 중심부를 형성하고 있는 교양 있는 중산층 시민들에게도 여전히 진보로 받아들여진다. 이 공포와 불안의 먹이사슬이야말로 20세기의 진보와 야만을 이루는 핵심 고리이다. 우리는 『진보와 야만 - 20세기의 역사』를 통해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또 21세기의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서 언급했던 20세기 초 만연했던 중심부 엘리트들의 낙관주의가 그러하듯, 21세기 초반인 현재 장기적인 예측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내리고 있는 비관적인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다.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 동안 세계가 진화해온 길과 세기말의 경제력과 정치력의 분포를 고려할 때, 세계는 다음 수십 년 동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고 전망한다. 이 전망은 1900년에 가장 부유했던 나라들이 20세기에 여전히 부유했던 것처럼 21세기에도 여전히 부유할 것이란 전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1992년 미국 과학아카데미와 영국의 왕립협회의 공동보고서는 “현재의 인구성장 예측이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고 지구상에서 인간 활동 패턴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기술은 세계의 상당한 부분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가역적인 환경 악화나 계속되는 빈곤을 방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21세기에도 한줌의 소수는 여전히 세상이 진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그 같은 방식으론 더 이상 지구의 자원과 생태계가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5년 미국의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는 미국의 전 지구적 권력과 세계의 모든 일에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지구는 매우 작은 행성이 되었다. 우리는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대기권에서든 심지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에서든 지구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본문327쪽>
이제 21세기의 인류, 아니 저자가 이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상정하고 있는 중심부의 교양 있는 시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억눌린 풍요로운 이 체제의 내부고발자로서, 생존의 가파른 비탈에 서 있는 주변부와 “지구상의 모든 것”, 생명을 가진 것들과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을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권력과 개입할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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