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2007, 창비
*
얼마 전 문화대통령 서태지가 돌아왔다. 방송 인터뷰를 보니 만약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간다면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정현철’로서 아버지와 대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바람이라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평범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못지않게 얼굴이 알려진 다른 연예인들 중엔 대중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목욕탕은 인터넷과 흡사한 구석이 있다.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는 나를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익명(匿名)의 욕탕 앞에서 옷을 훌훌 벗는다.
익명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익명이 아니라 인식되지 않기에 익명이다. 마치 우리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익명 속의 사람들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치부되는 것이다. 익명(匿名)과 유명(有名) 사이의 하중이 바로 존재의 무게이다.
그런데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떤 이들 가운데도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이 바람인 사람들이 있다. 시인 손택수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유년(幼年)이 누군가에게는 별스럽지 않은 평범한 일일지 몰라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시인에겐, 그리하여 아버지 대신 어머니와 누이를 따라 목욕탕엘 가야 했던 시인에게 목욕하는 일은 어느 정도의 굴욕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은 것으로 가로막은 것은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 때문이다. 아들에게만은 누구 못지않게 유명한, 그리하여 존재의 무게가 시커멓게 죽은 살처럼 묵직한 아버지는 아들에게만은 그 자국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의 “끝”을 아들에게만은 끝끝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적막하기만 한 당신의 등짝을 내어준 것은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아비는 그렇게 마지막에 가서야 자식의 소원을 들어준다. 이제 아들은 아비의 존재가 드리었던 무게를 온몸으로 짊어지게 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개인적 상념들에 사로잡혔다. 어릴 적 아비와 손잡고 목욕탕엘 가보는 것이 필생의 소원이었으나 평생 단 한 번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된 나의 바람과 서태지가 중퇴했다는 “북공고”. 아비와 내 몸에 아로 새겨진 흉터는 서로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게다. 결국 우리는 한 번도 벌거벗은 채 서로의 상처를 대면하지 못한 채 아비만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북공고. 87년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은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그 가운데는 몇몇 실업계 고교 친구들도 함께 했다. 그 중 하나가 북공고였다.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의 명동시위가 끝나고 난 뒤 인문계 출신 아이들 중엔 퇴학 당한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실업계 고교 아이들 중엔 결국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이젠 소식조차 끊겨버린 그들, 그 아이들의 삶이 내게 여전히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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