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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초콜릿, 권력의 달콤한 유혹 - <창비어린이> 2004년 겨울호(통권 7호)

초콜릿, 권력의 달콤한 유혹



초콜릿 전쟁 - 청소년 문학선 10 | 원제 The Chocolate War (1974)
로버트 코마이어 (지은이), 안인희 (옮긴이) | 비룡소


전교조 문제로 뜨겁던 여름이 지나간 1989년의 어느 가을 나는 모교의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후배가 수업 시간 중 교사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기 몇 명과 병원을 찾았다. 선배랍시고 찾아간 우리들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들고 간 꽃다발을 병에 꽂아주고, 음료수를 권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우리들은 만약 네가 원한다면 이 문제를 민주동문회 차원에서 다루도록 애써 보겠다는 말을 해주었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후배는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어머니를 불렀고, 우리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 안에서 후배의 울부짖는 고함이 들려왔다. “선배, 절 이용하지 마세요.”

성장소설의 전형을 탈피한 성장소설, 『초콜릿전쟁』

사적인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 것은 로버트 코마이어의 『초콜릿전쟁』이 내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어 몇 번이나 책을 덮도록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작품의 영감을 아들 필립이 학교에서 전통적으로 실시하는 초콜릿 판매를 거부한데서 얻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이 작품이 오늘날 미국의 청소년 소설을 대표하는 지위에 올랐으나, 처음 출판되기까지 그리고 출판된 이후에도 적지 않은 논란을 겪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출판되기까지 주요 출판사 일곱 군데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했고, 출판된 이후에는 학교와 도서관에서 강독 금지와 대출 금지 같은 검열과 투쟁해야 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그들이 그를 죽였다”로, 마지막 문장은 “아치와 오비는 아무 말도 없이 그곳에 잠시 더 있었다. 그런 다음 어둠 속에서 그 장소를 떠났다”로 마무리된다. 앞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읽고 중간 부분을 유추해보면 마치 1930년대 유행했던 대쉴 해미트나 레이먼드 챈들러 풍 하드보일드 탐정소설들이 떠오른다. 그 만큼 이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두우며, 청소년 소설은 밝고 명랑한 것이라는, 최소한 희망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기존의 청소년 문학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기성세대의 희망이다. 기성세대들은 청소년 문학을 통해 미처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성장소설(Bildungsroman)에서 성장(bildung)이란 한 인간의 자아가 갈등을 겪으며 성장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콜릿전쟁』은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범주에 들기 어려워 보인다. 이 소설은 자아 형성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한 인간의 자아가 망가지는가를 냉정하게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성장소설에서 주인공은 세상과의 갈등을 통해 성장하고, 사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며 어른이 되어 간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제리 르노'와 그를 괴롭히는 '아치 코스텔로'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각각의 이유로 끝끝내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다. 주인공 제리는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생활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그는 학창시절 동안 풋볼팀에서 뛰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 있으나 학교의 전통 행사인 초콜릿판매를 거부하면서 그의 소망은 철저히 망가진다. 야경대의 우두머리인 아치는 매우 냉소적인 인물이다. 그는 교사의 권위조차 비웃을 만큼 영악한 존재이면서 타인을 제 마음대로 부리고, 골리는 권력을 즐긴다. 아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모든 아이들을 장악한다는 즐거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제리는 타의에 의해서, 아치는 자의(?)로 세상과 화해할 수 없었다.

내 감히 우주를 어지럽히랴

국가가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듯, 교육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사회의 통제와 폭력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학교란 공간에는 두 개의 권력, 공식적 권력인 교사들과 학생들 사이에 존재하는 비공식적 권력(폭력)이 존재한다. 트리니티엔 레온 선생과 교사들이 묵인해온 비밀 서클 야경대가 그런 비공식적인 권력이다. 야경대의 우두머리 아치는 폭력을 사용하는 대신 비밀 과제를 내주고 강제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통제해왔다. 그의 권위는 야경대 비밀 과제를 수행해 본 아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제리가 처음 초콜릿 판매를 거부했을 때 같은 반 급우들은 누구나 이것이 그에게 내려진 야경대의 과제라는 것을 알아챘다.

차기 교장 자리를 노리는 레온 선생은 평소보다 무리한 초콜릿 판매를 강제하기 위해 야경대를 동원한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치는 평범한 신입생에 불과한 제리가 자신의 의지로 초콜릿 판매를 거부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장난스럽게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제리가 자신의 의지로 야경대가 지시한 기간이 지나서까지 초콜릿판매를 거부하면서 그들이 장악한 작은 우주인 학교의 권력 질서에 균열이 일어난다. 권력은 겉으로는 매우 견고한 듯 보이지만 단 한 명의 어린 학생이 용기 있게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 그런 점에서 제리의 사물함에 붙어있는 포스터“내 감히 우주를 어지럽히랴?”라는 구절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렇듯 학교를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 내지 축도로 읽을 수 있기에 교육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작품만으로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이 있고, 특히 황석영의 단편 『아우를 위하여』는 갈등 구조와 사건의 전개 과정이 『초콜릿전쟁』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을 지닌다. 『아우를 위하여』의 주인공 “나”는 주먹대장 영래 패의 전횡에 맞서 반 아이들과 합세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승리를 거둔다. 제리의 저항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은 잠시 자신들에게 떠안겨진 부당한 요구를,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이런 기분은 전교 400여 학생들 사이로 전파되고, 초콜릿 판매는 부진을 면치 못한다. 자신의 야심을 위해 초콜릿판매를 포기할 수 없는 레온 선생은 아치에게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도록 요구하고, 제리의 거부는 아치와 야경대의 지위마저 흔든다.

그러나 제리는 승리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을 다룬 두 작품에서 그가 승리할 수 없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큰 차이는 『아우를 위하여』에서의 영래패는 단순한 폭력집단인데 비해, 야경대는 대중의 심리를 조작할 정도의 영악함을 지닌 상대였기 때문이다. 야경대는 대중을 공범으로 삼을 만큼 교활했다. 제리의 거부에 마음이 쏠렸던 학생들은 야경대가 조작해낸 영웅놀이에 휩싸여 초콜릿판매를 학교의 이념에 대해 개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용기와 헌신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대목은『초콜릿전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알레고리 구조를 가진 소설이란 것을 반증해준다. 작가는 주인공을 정면에 배치시켜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대상화시켜 소외하지도 않는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다. 마치 다큐멘터리 카메라의 시선처럼 파편화된 여러 학생들을 소개하며, 각 개개인들을 인터뷰하듯 다룬다. 각자 인격과 개성을 갖춘 이들은 아치와 야경대의 선동과 조작을 통해 제리를 소외시키는 몰개성의 집단으로 변모한다.

제리는 갑자기 “완전히 투명한 유령”처럼 취급된다. 『아우를 위하여』와 『초콜릿전쟁』에서 두 주인공이 상대해야 하는 대상의 차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교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레온 선생은 그가 가진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마치 나치 선전상 괴벨스처럼 학생들의 심리를 왜곡시킨다. 학생들은 부당한 대우를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인생이 부패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진정으로 이 세상에 영웅은 없으며,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조차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에 비해 황석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교사는 “애써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무서워만 하면 비굴한 사람이 된다”고 일깨워준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제리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초콜릿판매는 성공리에 마무리된다. 교활한 아치는 제리를 본보기 삼아 다시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가 생길 수 없도록 하고 싶었다. 진저를 내세워 제리를 호모라 욕하고, 린치를 가했던 아치는 교활한 제안을 한다. 제리에게 명예를 회복하고, 복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권투시합을 주선한 것이다. 평범한 소년으로, 개인적인 원칙을 고수하고 싶었을 뿐인 제리는 함정에 빠진 검투사처럼 보다 많은 피와 폭력을 요구하는 군중(학생)의 아우성에 파묻히고 만다. 『초콜릿전쟁』을 읽으며 제리를 응원하고, 해피 엔딩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맞닥뜨릴 사회는 과연 학교의 현실보다 덜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우리는 과연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양심의 원칙들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는『초콜릿전쟁』을 통해 개인의 사소한 일탈행위를 처벌하는 국가주의와 집단의 광기,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와 작동방식을 떠올릴 수 있다.

청소년 소설로서는 너무 암울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냔 의문에 대해 작가는 “물론 슬픈 일입니다. 현실과 마주한다는 것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버랜드에 살게 될 뿐입니다. 그곳은 성장도 승리의 가능성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최근 내가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후배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선생님은 아직도 모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뼈아프지만 그것이 우리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초콜릿전쟁』은 분명 해피엔딩이 아니다. 권투시합 끝에 쓰러진 제리는 친구 구버에게 “속임수야. 우주의 질서를 방해하지마라, 구버, 포스터가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라고 충고한다. 제리에게 세상은 속임수였고,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제리의 목소리에서 1989년 후배의 고함을 느꼈다. 세상은 평범한 소년에게 조그만 통로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이 작품은 불행한 결말을 통해 현실이 비록 절망일 뿐이라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절망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면 인생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출처 : 창비어린이 7호(2004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