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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다리 놓을 교육은 뭘까 - <기전문화예술>, 2006년 9.10월호(통권 45호)

문화예술교육기획Ⅴ_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다리 놓을 교육은 뭘까



도정일·최재천, 『대담』, 휴머니스트, 2005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다소 거창해 보이는 부제이긴 하지만 인문학자 도정일(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비평이론) 선생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생물학) 선생의 『대담』은 부제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밀도 있는 대화를 책 속에담아내고 있다. 『대담』은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벌인 10차례의 대담과 4차례의 인터뷰를 엮은 책으로 얼마 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파동과 맞물리면서 우리 사회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교류와 문제의식이 얼마나 소중한 만남인지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로 주목받았다. 이 책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서로 다른 담론체계와 배경문화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 유전자와 문화, 복제와 윤리, 창조와 진화, DNA와 영혼, 육체와 정신, 신화와 과학, 인간과 동물, 아름다움과 과학, 암컷과 수컷, 섹스·젠더·섹슈얼리티, 종교와 진화, 사회생물학과 정신분석학 등 13개 장章에 이르는 방대한 대화를 통해 소통을 도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얼마 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진위 여부가 도마 위에 올랐을 무렵,모 국립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로 계신 분과 함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와 요사이 유행하는 인문학이 자연과학의 용어와 개념을빌려 오는 문제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미리 전제했던 것은 흔히 사회과학은 확률과 통계를, 자연과학은 정의定意와 확증을 통해 진리(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문학은 무엇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일까라는 의문이었다. 과연 인문학은 학문, 과학이 될 수 있을까. 서구에서 과학은 ‘Science’인데, 이 말은어떤 ‘사물을 안다’는 라틴어 ‘scire’에서 유래된 말이다. 넓은 의미에서 과학을 의미하는 서구의 Science는 동양의 배울 학學과 연계될 수 있는 말이고, 그 자체로 학문學問을 의미한다. 그에 비해 동양의 과학科學이란 말에서 ‘科’는 곡식을 의미하는 ‘禾’를 말 ‘斗’로 헤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감수하고 말한다면, 서구에서의 과학이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동양의 과학은 ‘헤아린다’는 뜻이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 과학이 인식의 학문이라면 동양에서의 과학은 이해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의 눈에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지만 과학자의 눈에는 빛의 파장이 400nm(나노미터)에서 700nm 사이의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빛이다. “하늘에 무지개 바라보면 / 내 마음 뛰노나니, /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이라고 노래했던 시인 워즈워드에게 ‘무지개’는 또 그 이상의 다른 존재였다. 자연과학의 눈으로 보면 “400nm에서 700nm 단위의 빛의 파장”을 지닌 무지개는 언제나 같은 현상이지만, 시인의 눈,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인간의 감정으로 바라본 무지개는 늘 다른 무지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1미터의 10억분의 1 단위를 다루는 나노미터 이상의 복잡성을 지니게 된다. 이와 같이 복잡한 ‘인간을 공부하는 동물’인 우리는 지금도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교육하는데, 어릴 적부터 서로 다른 세계로 구분된 교육 체계 속에서 두 집단은 서로를 낯선 세계에 속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모든 진리는 일정한 현실성을 지닐 뿐이며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용된다. 그것 자체로서는 정당한 주장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것이 어느 무엇과도 연관을 갖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이 두 주장은 하우저의 말대로 무의미한 주장에 그칠 수 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한다는 공통의 목적을 지녔음에도 각기 다른 길을 추구한 결과 이제는 서로간의 이해와 소통마저어려워진 두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매개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도정일과 최재천, 두 사람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으로 논의하는 주제 “문화와 예술”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학문의 경계란 인위적인 방법론에 불과하다. 미하일 바흐친의 말처럼 “존재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이며, 이제 학제 간[inter] 연구의 단순한 조합을 뛰어넘어 트랜스trans해줄 수 있는 가교이자 매개로서의 교육이 필요한 때다. 그것이 문화예술교육이다.




출처: 기전문화예술, 2006년 9.10월호 Vol.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