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피시 Banana Fish - 요시다 아키미 | 김수정 옮김 | 애니북스(2009)
"바나나 피쉬"란 만화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우연히 알게 된 모 사이트의 (현재는 역사 선생님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운영자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닉네임이 애쉬(Ash)였다. 영어 '애쉬'는 타다 남은 재란 뜻과 물푸레나무란 뜻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애쉬는 만화 "바나나 피쉬"의 애쉬 링크스였다. 전에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공중화장실과 목욕탕을 제외하고 문화의 장르 분화에서 만화처럼 확실한 성(性) 구분이 있는 것도 드물다. 아무리 잘된 순정만화라도 어지간해서 남성들이 보는 일은 드물고, 여성들이 선호하는 장르 역시 남성 만화 애호가들의 그것과는 구분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만화의 이런 성별 구분 역시 모호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시다 아카미의 "바나나 피쉬"는 유니 섹스 모드의 만화다.
장르(genre)란 무엇인가? 본래 장르란 생물학에 쓰이던 용어로 종(種) 다음에 오는 ‘속(屬)’의 의미를 지닌 말이라고 한다. 그것이 문학. 예술 분야로 옮겨지면서 부문, 양식, 형(型)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이 중에서 한자 "형(型)"은 '거푸집'이란 뜻에 유의해보야 하는데, 이것은 현재 사용되는 장르 영화의 중요한 속성이 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영화 문법에서 장르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것은 시나리오 문법상의 캐릭터 형성과 거의 맞먹는다. 그 이유는 바로 장르가 제품을 찍어내는 거푸집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구조)를 갖추게 되고, 상업대중문화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할리우드 영화문법은 좀더 대중적인 기호와 취향, 구미에 맞는 이야기구조를 발견해낸다. 다시 말해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구조가 무엇인지 영화자본과 제작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의 욕구와 기호에 맞는 이야기구조로 분화되어 정착한 것이 바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멜러, 액션, 서부극 등은 모두 하나의 문법 체계 안에 있으므로 관객들은 마치 캠벨 수프(Campbell Soup) 통조림 캔에 각인된 토마토, 치킨, 감자, 양송이 등등 자신의 기호에 맞는 영화 티켓을 예매하면 된다. 이것은 영화자본과 대중 사이에 체결된 일종의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8금(禁)" 이하의 등급을 받은 영화에선 절대로 섹스, 살인, 강간 등이 여과없이 보여지지 않는 것처럼 장르 영화들은 각각의 문법을 통해 관객의 취향에 영합 혹은 배려함으로써 영화자본은 흥행의 안전성을 보장받고, 관객들은 취향과 선택의 안전을 보장받는다. 영화연구의 초창기엔 이런 장르영화들을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대량생산된 제품이라 하여 폄하했고, 이런 문법에 충실하지 않은 이들을 '작가주의'라 불렀다. 그러나 작가주의 비평가들은 이런 장르 영화 안에서도 작가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장르 = 신화"라고 생각하는데, 구조와 의미의 구축이란 면에서 이 둘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요시다 아카미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특이한 만화작가라 할 수 있다. "바나나피쉬"에 등장하는 인물 캐릭터는 순정만화의 그것인데 비해서 "바나나피쉬"의 내러티브는 액션 만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혼재 혹은 하이브리드는 오늘날엔 매우 흔한 것이 되었다. 사실상 이런 하이브리드적인 요소들이 도입되기 시작한 계기는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를 그 기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스타워즈"에서 온갖 신화들의 흔적, 장르의 흔적들을 발견해낸다. 요사이 제작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이런 장르의 이합집산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해진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고, 남성, 여성은 물론 각 장르의 취향을 가진 이들을 골고루 만족시키기 위한 상업적 고려와 계산이 뒤따른 것이다. 이는 영화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나나피쉬"는 1985년부터 1994년까지 일본의 "별간 소녀코믹"에 연재되어 일본에선 상당한 인기를 누렸으나 국내에선 해적판 출판만 몇 번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 완간되지 못했다. 요시다 아카미의 "바나나 피쉬"가 국내에서 일반 독자들의 호응을 널리 받지 못한 것은 "바나나 피쉬"의 이런 하이브리드 경향이 대중의 코드에 아직 제대로 접속하기 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대신에 "바나나 피쉬"는 저주받은 걸작까지는 아니어도 소수의 매니아들에게 재발견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터넷상의 만화 매니아들은 자체적인 능력을 동원해 완간되지 못한 만화의 뒷부분을 번역하고, "바나나 피쉬"의 여러 면모들을 소개했다.
"바나나 피쉬"는 우연하게 발견된 신종 마약의 이름이다. 만화의 도입부는 음모 영화의 도입부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 베트남전에 이른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클레멘타인을 부르며 휴식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병사가 M-16소총을 들고와 난사한다. 그의 친구 맥스 로보가 하반신을 쏘아 간신히 진정시키지만 그는 "바나나 피쉬"란 의문의 단어를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다운타운을 장악하고 있는 애쉬 링크스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우연찮은 기회에 살인 장면을 목격한 애쉬 링크스. 살해당한 남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소량의 약이 담긴 앰플을 넘긴다.
애쉬 링크스. 다운타운의 삵괭이들을 이끄는 리더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해보이는 외모에 금발 미소년, IQ 200을 상회할 만큼 뛰어난 두뇌에 많은 량의 독서, 뛰어난 컴퓨터 조작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처음부터 그런 인물이란 것이 드러나버렸다면 이 만화는 그리 재미있지 않았을 텐데, 작가는 필요한 부분마다 조금씩 이 소년의 능력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작가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애쉬의 총 솜씨다. 사용하기 편하게(은밀히 감추거나, 뽑기 편하게) 짧게 자른 총신의 스미스&웨슨 38구경 리볼버를 귀신처럼 다룬다(리볼버는 자동권총에 비해 방아쇠 압력이 높은 편이라 초탄 명중률이 낮고, 장탄수가 적어 사용하기엔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가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냉정하기 그지 없는 두뇌를 지닌 인물이기만 하다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거다. 그는 8살 때 강간당하고, 그때 첫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그는 아동 포르노 무비의 주인공으로 이용되며 성학대를 당한다.
이야기는 후반부로 흐를수록 코르시카 마피아와 미국 정부 당국까지 연계된 거대한 음모로 이어지고 다시 애쉬의 가정사와 연계되면서 그가 어째서 "바나나 피쉬"의 정체를 추적하게 되는지,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 "바나나 피쉬"는 내러티브가 있는 장르에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나나 피쉬"의 내러티브 자체는 매우 흔한 것이지만, 그 이야기를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애쉬가 이끌어간다는 사실만으로 대단한 상승효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동성의 친구 에이지. 요시다 아카미는 "바나나 피쉬"에 야오이적인 요소들을 대중적인 시선에 맞춰 적당한 강도로 저감시켜 등장시키고 있다.
야오이 장르의 등장은 일본에선 이미 1976년 타케미야 케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에서 동성애뿐만 아니라 근친상간까지 다루며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만만치 않다. 야오이란 "야마나시(やまなし), 오치나시(おちなし), 이미나시(いみなし)"란 말(주제없고, 소재없고, 의미없다)의 약어라고 하는데, 그 의미 자체가 매우 반문화(counter culture)적임을 알 수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란 성격에서 느슨한 형태의 사회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야오이 문화에 대한 찬반을 떠나 그 자체에 남성지배문화, 가부장적 권력 형태에 대한 저항적인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할렘의 여성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규방반란이라 할 수 있는 야오이는 우리나라에서 젊은 층의 여성들(1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야오이는 근친상간, 동성애, 강간 등 현실 장르 안에선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으므로 체제 안의 장르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야오이의 생산은 대개 프로에 근접한, 혹은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들에 의해 생산된다. 이런 야오이의 자생성은 상대적으로 사회의 검열로부터 자유로와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야오이의 특성과도 잘 부합된다(야오이 문화에 대해선 나중에 좀더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어찌되었든 "바나나 피쉬"는 아동 성학대, 동성애와 "에이지"란 소울 메이트의 존재 등으로 야오이적 요소들을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복잡한 이야기의 대단원을 매듭짓기엔 다소 약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또한 그만큼 적절하기 어렵다는 평을 얻을 수 있다. 동네 갱들부터 시작해서 코르시카 마피아, 차이나 마피아, CIA,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용병들과의 대결에서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남은 애쉬는 뜻밖의 일격으로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이거 스포일러인가?). 애쉬의 죽음은 그만큼 뜻밖이고, 심지어 충격적이기까지 하지만 작가 요시다 아카미는 시종일관 애쉬의 죽음에 대한 복선을 여러 군데 설치해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보면 애쉬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청춘이 불멸인 까닭은 그것이 인생의 매우 짧은 시기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요절한 청춘 스타들을 길이길이 기억하는 것이다(*일설에는 "바나나 피쉬"가 할리우드의 영화로도 만들어질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영화의 주인공은 "리버 피닉스"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기사 그가 아니라면 누가 애쉬 링크스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혜성처럼, 섬광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연민으로 말이다. 애쉬는 죽음으로 에이지의 우정(혹은 사랑)을 영원히 차지하게 된다. 액션만화의 뒷처리로, 순정만화의 뒷처리로 이보다 적절한 선택도 하기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바나나 피쉬"는 액션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그 본질은 순정의 문법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만화의 또다른 문법인 그림체와 칸 구분 등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는데, 액션 만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칸의 격자 구조를 탈출하듯 역동적인 연출은 이 작품에선 거의 볼 수 없고, 시종일관 차분한 프레임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액션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는 장면에서도 우리는 액션 그 자체가 아닌 캐릭터에 집중하게 된다. "바나나 피쉬"에는 할리우드 여성 감독들 "미미 레더, 캐서린 비글로"의 액션영화들에 숨겨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체취와 이면에 잠재된 여러 코드들을 따라가며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아, 끝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바나나 피쉬"는 J.D.샐린저의 작품 아홉개의 이야기(Nine Stories) 중 첫번째인 "A Perfect Day For Bananafish"에 등장하는데 바나나피쉬는 구멍에 들어갈 때는 보통 물고기처럼 날씬하지만 구멍 속에 있는 바나나를 엄청 먹어버리고 살이 쪄서 결국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라 한다. 어쨌든 바나나피쉬를 보면 죽게 된다는 이 설정을 놓고 보았을 때, "바나나 피쉬"의 "애쉬 링크스"에게 바나나 피쉬는 "에이지"가 아니었을까?
'REVIEW > 만화/애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노 히데아키 - 건버스터 : 톱을 노려라 (0) | 2011.03.29 |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전7권)- 미야자키 하야오 | 학산문화사(2010) (0) | 2011.03.21 |
슈퍼 로봇의 혼 - 선정우, 시공사(2002) (0) | 2011.03.05 |
도박묵시록 카이지(총 39권) - 후쿠모토 노부유키 | 학산문화사 (1) | 2011.02.10 |
마스터 키튼 세트(1~18) -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 가쓰시카 호쿠세이 스토리 | 대원씨아이(2004) (3) | 2011.01.21 |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최규석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4 (0) | 2011.01.17 |
남쪽손님 : 보통시민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 -상.하 | 오영진 | 이미지프레임(길찾기) | 2004 (1) | 2011.01.11 |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TAKEHIKO INOUE) | 대원씨아이 (0) | 2010.12.24 |
천재 유교수의 생활 -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 (0) | 2010.12.16 |
시로 마사무네 - 『애플시드』 (0) | 2010.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