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키튼 세트(1~18) - 우라사와 나오키 그림 | 가쓰시카 호쿠세이 스토리 | 대원씨아이(2004)
"우라사와 나오키"란 이름은 90년대 중후반부터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 일본의 만화작가이다. 내가 우라사와 나오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파인애플 아미(Pineapple Army, 1986)"를 통해서 였다. 이 작품에서 "파인애플"의 의미가 무엇인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파인애플이란 미국식 그레네이드(수류탄)의 별명이란 거다. 이 작품을 보면서 처음에 굉장히 낯설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무렵 소개되던 일본 만화의 거의 태반이 아동만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들인데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그림체 또한 당시 만화선들보다 다소 굵고, 거칠고 인물 캐릭터 묘사도 예쁘다기보다는 평범한 느낌이어서 도리어 그런 부분들이 매우 낯설게 여겨졌다. 다만 우라사와 나오키가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인 사실적인 무기 묘사, 전문가 수준의 서바이벌 파이팅 기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서바이벌 게임 말고, 서바이벌이란 극한 상황과 지역에서 생존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마스터 키튼"은 내 개인적으로는 약간 특기할 만한 작품이다. 우선 다시 만화를 읽기 시작하면서 내 평생 처음 사들인 만화책이기 때문이다(이후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20세기 소년", 요시다 아키미의 "바나나 피쉬" 등을 사들였다). 만화책에 대해 특별한 폄하는 없었지만 이전까지는 돈을 들여 사놓고 집에 보관하면서 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스터 키튼"의 사실적인 묘사와 탄탄한 구성력, 지적이면서 인간적인 재미는 나를 사로잡았다. "마스터 키튼"의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이 작품이 주는 재미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 세계 모든 특수부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SAS 휘장: Who Dares Wins
아동용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문학 장르에 비유하면 시(詩)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동용 그림책은 대개 24쪽 내외로 한장한장의 그림에 상징과 함축된 의미를 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만화는 내러티브와 화면 구성 등을 살펴보면 쉽게 영화에 비유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만화를 대체로 구분없이 사용하지만 크게 카툰과 코믹스로 분류할 수 있고, 코믹스 내에서도 극화체와 만화체의 구분을 둔다. 대개의 일본 만화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극화체 중간중간에 코믹한 요소들은 만화체를 사용하는 방식을 오간다. "마스터 키튼"에선 이런 코믹한 만화체 사용은 전무하다. 그런 점에서 "마스터 키튼"은 완전한 성인용 만화라고 할 수 있다. 성인용 만화라고 하면 대개 섹스와 폭력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나는 것을 연상할 수 있지만, "마스터 키튼"은 아무리 점잖은 자리에 가더라도 펼쳐놓고 읽는데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도리어 신문에서 알려주지 않는 내용, 외신의 행간을 잘 짚어봐야 해석가능한 사건들을 일러주는 교양이 녹아 있다.
"마스터 키튼"이 주는 첫번째 재미는 이것이 성인용 만화라는데 있다. 예를 들어 "마스터 키튼" 6권 '위선의 유니온 잭'에는 영국SAS와 아일랜드 IRA 사이의 일상화된 테러 이야기를 주요 에피소드로 삼고, 8권 "표범 우리"에서는 영국이 참전했던 걸프전쟁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를 담는다. 경우에 따라 "마스터 키튼"이 보여주는 균형잡힌 정의는 진실한 정의에 해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내용은 동의할 만한 수준의 것들이다. 다이치 키튼 자신은 이혼당하여 딸 하나를 둔 시간 강사다. 그는 도나우강 문명이란 고고학 분야의 소수의견를 주장하는, 그래서 학문적으로는 높이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지식인이자 전직 SAS 서바이벌 교관, 현재는 로이드 보험사의 직원이다. 그의 직업이나 생활이 성인이라서 이 작품이 성인용은 아니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스토리 작가 가쓰시카 호쿠세이와 더불어 인문학적인 교양이 녹아든 지적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성인용이 된다.
▶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 '다이치 키튼'. 겉보기에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보험조사원이지만 영국특수부대(SAS) 출신의 서바이벌 마스터이자 고고학자로 '스펙'만 놓고 보자면 007의 제임스 본드 쯤 되려나~
"마스터 키튼"이 주는 두번째 재미는 주인공 "다이치 키튼"이 보여주는 균형잡힌 시선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키튼의 캐릭터가 선사하는 재미라고 할 것이다. 키튼은 일본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동양과 서양의 혼합이 반드시 이 양자 사의 절묘한 배합을 이뤄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키튼의 경우에 한정해보자면 이 양자가 적절한 정도로 배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구의 합리성과 동양의 인간미를 한 몸에 녹아들이고 있다. 그는 양측의 세계에 모두 속해있지만, 동시에 약측의 세계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둔 인물이다. 그는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외의 대상이지만, 스스로 자초한 고립이라는 점에서 또한 강자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와도 일맥상통한다. 많은 이들이 조직에 소속되길 원치 않지만, 실력있는 자로 대접받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마스터 키튼"은 이런 시선을 통해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폭력을 보여주는데, 네오 나치들에 의한 터키인 차별을 다룬 "검은 숲"에서 잘 드러난다.
세번째 재미는 "마스터 키튼"의 사실성이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소설들 "다빈치 코드"와 같은 것들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이런류의 소설을 사실(fact)와 소설(fiction)을 합성해서 팩션(faction)이라고 한다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노라면 저절로 중세 교회와 수도원의 모습, 종교재판, 당시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스터 키튼의 사실성은 우선 그림의 배경이 되는 유럽 곳곳의 풍광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는데 있다. 키튼이 행동하는 지역이 상당히 여러 곳이란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사실적인 묘사는 충분한 사전조사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그는 이런 조사를 바탕으로 "몬스터"에서는 더한층 깊어진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스터 키튼"의 사실성이 단순히 배경 묘사 정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우선, 마스터 키튼 자신이 지닌 놀라운(?) 서바이벌 능력과 인문학적 지식에 바탕한 그럴듯한 이야기들이 지닌 사실성은 매력을 더해준다. 우선 키튼이 SAS(Special Air Service)의 서바이벌 교관 출신이고,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이란 설정은 미국 중심에 익숙해 있는 이들에겐 참신하면서 매우 적절한 설정으로 보인다. SAS를 우리말로 직역해보면 공군특수부대 혹은 공정부대 정도가 될 텐데, SAS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부대가 아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수많은 특수부대가 존재하는데 그 종류가 가장 다양한 나라는 물론 미국이지만, 모든 특수부대의 아버지라고 일컬을 만한 존재는 영국의 SAS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덩케르크에서 치욕적인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은 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추축국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계획한다.
이때 생겨난 부대가 오늘날 특수부대란 보통명사로 사용되는 "코만도"인데,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 영국의 SAS와 SBS이다. 이 가운데 "돌진하는 자가 승리한다(who dares win)"는 모토를 지닌 SAS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 이들의 명성을 높이게 된 사건은 지난 1980년 5월 런던 주재 이란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을 통해서였다. SAS는 헬기를 통해 대사관 지붕으로 내려와 대사관 내부로 잠입한 뒤 테러범 6명 중 5명을 사살하고, 진입 전에 살해당한 1명을 제외한 19명의 인질 모두를 무사히 구출해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미군 레인저부대가 SAS에 의해 교육받았고, 전후엔 독일 GSG-9 등을 교육했다. SAS는 대테러작전에 필요한 전술교리는 물론 이때 필요한 무기들을 개발하여 세계의 대테러부대에 보급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테러작전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임무인 군 작전에도 참여하였는데, 1980년 아프가니스탄에선 무자헤딘을 교육시켰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 1991년 걸프전 등에 참전했다.
사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마스터 키튼"이 지닌 사실성은 그 자신의 관심과 전문지식도 중요했지만, 그의 작업을 도와주는 여러 전문가 그룹이 존재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재미의 요소들도 "마스터 키튼" 자신이 지닌 매력에는 비교할 수 없다. "마스터 키튼"은 한 권 당 서너 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방식의 작품이다. 그 탓만은 아니겠지만 특정 장르로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에피소드들은 그 특성에 따라 여러 장르로 분화될 수 있는데, 작품을 읽다보면 마치 종합선물세트를 풀었을 때 느낌 같다. 추리, 미스테리, 액션, 휴먼 드라마 등 온갖 장르들이 뒤섞여 있다. 이렇듯 온갖 장르의 혼합이 가능한 것은 "다이치 키튼"이란 캐릭터가 지닌 독특한 성격과 개방성에서 유래한다. 혹자는 "마스터 키튼"을 '셜록 홈즈' '맥가이버' '인디아나 존스'를 한데 버무린 듯한 이라고 묘사하는데, 물론 이 말들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스터 키튼"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고려했을 때 이 사람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는 바로 이제는 고인이 된 "피터 포크"가 열연했던 "형사 콜롬보"다.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 캐릭터의 개방성은 고고학 박사, 지식인, SAS특수부대원, 일본과 영국의 혼혈, 로이드 보험조사원 등 어느 것을 해도 어울리지만, 동시에 어느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만의 캐릭터를 구성해낸다. 그는 고고학박사지만 난 척하지 않고, 전직 특수부대원 출신이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국적 역시 작중 인물들조차 헷갈려 할 만큼 모호하다. 이런 모호함은 특히 겉보기에 어수룩해 보이고, 그가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억센 인물들과 겨루어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더 큰 빛을 발휘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포즈다 싶었는데, 형사 콜롬보와 매우 흡사하다. 털털이 시보레를 손수 운전하고 다니는 형사 콜롬보, 어깨는 축 처져 있고, 두 눈은 졸음에 찌들었다. 누런 트렌치코트 어깨 위엔 비듬이 수두룩할 것 같은 졸린 눈의 이 형사는 늘상 자신보다 뛰어난 지능과 지위, 권력과 부를 지닌 이들과 겨루어야 한다. 범인들은 그의 외모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콜롬보의 승리다. 마스터 키튼의 승리는 이런 어리숙함, 선량함에 의해 더욱 빛이 난다. 이는 또한 키튼의 인간미를 더해주어 "마스터 키튼"의 전체 이야기구조를 강화시켜주는 미덕을 지닌다.
◀ 마스터 키튼의 주요 등장인물들
이외에도 자칫 단조로와지기 쉬운 옴니버스 방식의 이야기들에 재미를 더해주는 적절한 조역들이 등장한다. 같이 보험조사원 일을 하고 있는 다니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실제로는 매우 신사적인 아버지 히라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닮아 명석한 키튼의 외동딸 유리코, 키튼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마치 영화 "그랑 블루"에서 장 르노가 연기했던 엔조(Enzo)를 연상케하는 캐릭터인 찰리 등이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그렇다고 "마스터 키튼"에 장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의 균형잡힌 시선이 때로 강박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데, 균형이란 말만큼 정치적으로 위태로운 감각도 드물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을 취급할 때 마스터 키튼은 선택을 한다기 보다는 그 양자 사이에 그냥 놓여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것은 균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관일 수 있다. 그의 이런 방관적인 자세는 "마스터 키튼"의 휴먼드라마가 얕은 성찰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한다. 실제로 다이치 키튼은 영국도 일본도 아닌 코스모폴리탄처럼 그려지지만 작품의 내용은 주로 근현대사 속에서 영국이 저지른 실책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키튼의 일본인 아버지 히라가는 적절한 조언자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전체 18권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하나의 에피소드도 일본의 실책을 다룬 것이 없으며,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느낄 수 없다. 또 한 가지는 이야기가 18권에 이르는 동안 이야기 패턴이 익숙해져 버리는 바람에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대중만화에서 쉽게 다루기 어려운 인종차별, 전쟁, 역사 등을 작품 속에 적절히 녹여 지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솜씨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작품만의 뛰어난 매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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