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이 아닌 ‘살림’의 정치
정권교체기마다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는 TV드라마 중에서 특히 ‘사극’이 큰 인기를 얻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던 1998년엔 드라마 <용의 눈물>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던 2003년엔 드라마 <태조 왕건>이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엔 드라마 <이산>과 그 뒤를 이어 <대왕 세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권교체기에 사극이 특히 인기를 얻는 까닭은 비록 드라마의 형태이지만 이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선 ‘평화적 정권교체’를, <태조 왕건>에선 ‘외세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통일의 대업’과 ‘지역화합’에 대한 바람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사극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를 주로 다뤘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이산>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이 추진했던 개혁정책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제왕학’의 또 다른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어떻게 해야 개혁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생공화국 대한민국은 치열한 이념대립 끝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얼마 전 정부수립 60주년을 경과했다. 조선의 건국 과정 역시 그 못지않게 치열했다. 고려 유신들을 처리하는 과정이 그러했고, 형제간에 피 흘리는 권력투쟁으로 유혈이 낭자한 건국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정권을 탈환한 이들은 그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 하지만 건국 60주년을 논하는 마당에 민주화 이후 지속된 정부들과 현재의 이명박 정부를 단절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아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김영삼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이래로 5년마다 우리는 과거와의 거듭되는 단절과 청산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로는 청와대의 행정직 관료들은 물론 정부가 투자한 공사 사장들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새로운 정권 쪽 사람들로 바뀌어 나갔고, 때에 따라서는 지난 정권에서 일한 사람들을 조사해 감옥에 보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스스로를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비하하는 공무원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 이후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태종의 치세만을 따랐던 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의 4대 임금에 오른 세종은 태종의 장자도 아니었고, 대내외적으로 태평성세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외삼촌과 처가 일족이 거의 몰살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자신의 치세 기간 동안 한 명의 대신도 죽이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치세를 더욱 빛냈던 인물로 오늘날까지 청백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황희조차 처음부터 세종의 사람이 아니었다. 황희는 그 자신도 흠결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세워 양녕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다가 태종에 의해 귀양까지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조선은 작은 나라이고 인재는 다시 얻기 어려울 만큼 귀하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능력에 따라 등용한다.
대통령 이명박에게 국민이 기대한 통치이념은 아마도 ‘경제 살리기’로 상징되는 실용주의 노선이었을 것이다. 실용주의하면 떠올리게 되는 등소평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것이 최고”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핵심도 이념이나 노선이 아닌 능력 위주의 인재채용을 의미하는 것이고, 프랑스의 우파 정치인 출신인 사르코지 대통령도 국가개혁의 밑그림을 그리는 프랑스성장촉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좌파 지식인인 자크 아탈리에게 맡겼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용주의의 첫걸음이란 자기 인맥의 사람을 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반대파라 할지라도 포용하고 화합하는 능력 위주의 인재채용으로 출발한다. 이제라도 ‘죽임’이 아닌 ‘살림’의 정치, ‘신뢰’의 정치가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출처 : <인천일보> 2008.09.0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