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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신기섭 - 추억

추억

- 신기섭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 속같아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 속을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에서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속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석구석
번지더니 몸 바깥으로 터져나오는
추억,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하다

*

2005년 12월 4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배의 시를 읽다가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의 똥냄새를 기억해낸다. 추억이다. 나도 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개가했다는 후배. 내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미처 개가를 결심하기 전 화려하게 늙어버렸다.  어머니 곁에서 나는 초라하게 늙어간다. 79년생의 시인은 먼저 할머니 곁으로 가고, 나는 그보다 9년을 앞서 살고 있는데도 그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나도 내가 죽을 때 불길한 예감 한 자락 얻을 수 있을지....  아직도 철이 덜든 선배는 그걸 먼저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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