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여덟 상자
- 정춘근
경로당에 모여
기억 속에 똬리 틀은 고향 자랑을
국수 타래처럼 풀어내던 노인들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는데.
만물 박사 평양 김씨
라면 한 개 풀면 오십 미터라 한 것뿐인데
셈이 빠른 황해도 최씨 노인
휴전선 이십 리는 라면 여덟 상자라
속없이 이야기한 것뿐인데
오늘 라면은 매웠나 보네요
노인들 눈자위가 붉은 것을 보면
라면을 그대로 남긴 것을 보면
경로당 구석에서는
라면 끓는 검은 솥만
덜컹덜컹 기차 소리를 냅니다.
*
정춘근의 <라면 여덟 상자>는 시에서 사실적인 국면이 심리적인 국면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이것이 시적으로 승화될 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시다. 시의 전체 과정은 경로당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이 간식 참삼아 라면 몇 개를 끓이며 나누는 이야기를 하나의 골격으로 삼고 있다. 이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건 하나가 분단과 실향,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소박하지만 자연스럽게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너무나 짜임새 있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앞의 두 연은 경로당에 일삼아 모여 시간을 떼우는 어르신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덤덤하기만 한 것 같지만 '라면'이라는 국수 면발 하나를 통해 시 전체를 관통하도록 훌륭하게 짜여져 있다. 비유 하나만 보더라도 시인이 비유와 국면 전환에 이르는 과정을 얼마나 공들여 정성스럽게 다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르신들의 '고향 자랑'이 '국수 타래처럼'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다시 라면 한 개의 길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 박사 평양 김씨와 황해도 최씨 노인의 이야기는 개별적으로는 그저 경로당에서 벌어지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휴전선 이십리 길이에 연결되자 사실적인 국면은 갑자기 심리적인 국면으로 전환되고, <라면 여덟 상자>는 갑자기 분단과 실향에 대한 시로 변모한다.
경로당 구석에서는
라면 끓는 검은 솥만
덜컹덜컹 기차 소리를 냅니다.
솥도 그냥 솥이 아니라 증기기관차를 연상하게 하는 '검은 솥'이다. 잘된 시는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다. 비록 단순하고 소박하긴 하지만 <라면 여덟 상자>는 시작법의 기본 중 하나를 잘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