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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허수경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허수경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 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룡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출처 : <문학과 사회>, 2009. 여름(통권 86호)

*

예전에 날 가르쳤던 은사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은 존재의 본질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했었다. '개'를 '개'라 부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개'라는 존재의 본질로 들어가는 첫걸음이라 말한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의심할 바 없는 너무나 명쾌한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종(種)'으로서의 '개'를 호명하는 '이름'으로서의 '개'와 '해피, 메리, 쫑'을 아는 것은 별개다. 종으로서 개의 본질을 아는 것은 물론 개별적인 '해피, 메리, 쫑'을 아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가 '해피'라 부르는 '어떤' 개와의 인연(관계)이 주는 존재의 무게를 해석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김춘수의 '꽃'과 어린왕자의 '장미'는 다른 존재다.

이름 없는 섬, 이름 없는 것들, 말 못하는 것들, 말을 못 알아듣는 것들, 그러므로 죽여도 좋은 것들에게 근대의 입구, 근대의 세월은 지옥문이었다. 불교에 유명한 선문답, 화두가 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조주 선사는 '없다(無)'라 답했다(狗子無佛性). 이것이 불교의 유명한 무(無)자 화두다. 불성(佛性)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삼위일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신(성령) 중 내 안에 깃든 성신을 의미한다. 불성을 다른 말로 불종성(佛種性)이라고도 한다. 부처의 본성 내지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는 성품을 의미한다.

초기(원시)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지만 번뇌의 때에 가리워져 본래의 불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깨닫기만 한다면 누구나 부처와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석가 입멸 후 100년경까지 석가의 가르침을 해석하기 위해 논쟁을 거듭했던 부파불교(部派佛敎)는 교리해석에 치중하며 대중과 멀어졌고, 자기수행의 완성를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출가를 전제로 한 학문적인 불교였다. 이에 반발한 대중들이 교단을 이탈하면서 출발한 것이 원시불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승(大乘)불교가 시작되었다.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열반경 涅槃經〉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명시한 최초의 대승경전이다. 불교의 사물(四物)이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로 되어있는 것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중생이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범종의 입구가 아래를 향한 것은 지옥에서 백팔번뇌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중생들의 영혼을 향해 울려퍼지라는 의미다. 법고는 축생들을, 목어는 수중생물들을, 운판은 공중을 떠도는 영혼들, 특히 새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지구는 당신과 내가 사라져도 중량에는 변화가 없을 테니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인간의 업보로 인해 지구가 무거워질 일도 아마 없을 게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는 인간이 모두 죽어 없어져도 계속 진행될 것이며, 설령 인간이 지구를 온통 파먹어버리는 날이 올지라도 우주적으로는 여전히 아무 일 없다. 그런데 나의 우주는 '개'라는 한 종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해피, 메리, 쫑'이란 구체적인 이름들의 우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당신이 부재한다면 나의 심장도 함께 아프다.

그런데 왜? 조주 선사는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당신도 무(無)자 화두에 빠져볼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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