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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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초여름 해남 대둔사 가는 길 옆 고정희 시인의 생가(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를 바라보며
철 없는 마흔이다. 지리산에 휩쓸려 가버린 시인에게도 그런 마흔의 시절이 있었나 보다. 말과 정을 제대로 건사해 제 나이 값을 하며 살아가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무거운 멍에다. 뜨거운 불덩이가 채 식지 않은 마흔이란 철 없는 나이를 포르말린에 중독시킬 수도 없고, 헹궈낼 수도 없으니 그렇게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흥건히 젖어갈 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