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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손택수 - 꽃단추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출처> 손택수,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통권 143호)

*



시(詩)는 어째서 행과 연을 구분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리듬(律) 때문이다. 그럼, 시에서 리듬이 왜 중요한가? 그건 시가 본래 노래였기 때문이다. 행갈이 하나가 시의 폭발력과 긴장을 좌우한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현대시는 대체로 내재율(內在律)이기 때문에 또 시를 읽을 때 요즘 사람들은 소리 내어 읽기 보다는 속으로 읽는 묵독(黙讀)을 주로 하기에 시의 리듬을 맛보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시는 소리 내어 낭송(朗誦)해봐야 그 본래의 맛을 알 수 있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이 문학적으로도 위대한 작품으로 살아남은 까닭은 단지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풍자의 맛이나 시대적 조건이 맞아떨어진 뿐만 아니라 이 시가 우리 전래의 판소리 리듬을 문학적으로 계승한 시였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낭창낭창하게 감기면서 깐족거리는 맛이 판소리의 리듬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계승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행갈이는 그렇다 쳐도 연갈이는 문제가 좀더 복잡하다. 이형기는 “의미(내용)와 소리(형식)의 유기적 결합이 운율의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같은 맥락에서 행갈이 보다 더 큰 구분이 연이다. 그러나 연 구분은 아무래도 단락의 의미가 더 크기 마련이다. 낭송보다 묵독이 일반화된 이후 시인들은 음악적인 측면보다는 회화성을 확보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시란 이미지(image)라고 배우는 바로 그것 말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소재와 같은 내용을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할 것인지 고민하다보면 리듬에 대해 배려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시의 리듬은 재즈 뮤지션의 그것처럼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손택수 시인의 「꽃단추」를 읽다가 갑자기 「오적」에서 재즈 뮤지션의 리듬 타령까지 흘러간 이유는 내 보기에 이 시는 한 편이 아니라 두 편의 시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적 정황만으로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하고, 여러 개의 시적 정황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 「꽃단추」는 두 개의 시적 정황이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해와 달, 금단추와 은단추의 시적 정황과 민들레 꽃단추라는 시적 정황이 민들레의 “흔들리는 실뿌리”처럼 야무지게 두 개의 각기 다른 시적 정황을 연결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지 않는 이도 있겠지만 내 눈엔 그리 보인다. 아쉽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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