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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읽을 때 만해도 나는 이 시를 받아들이기가 참 곤란했다. 그만큼 내가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정호승 시인 특유의 낭만적이고 센티멘탈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늘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늘 내가 책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깡패나 불량배가 되는 편이 좀더 어울릴 사람, 아니 최소한 그렇게 되어도 남들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는 조건 속에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제법 잘 살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 나의 환상이 깨진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신학년 신학기의 첫 한 주가 지날 무렵 학생부 선생이 수업시간 중에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별로 자각하지 못할 뻔 했다. 그는 수업 중에 날 불러냈고 복도 끝에 세워놓고 어깨에 짐짓 다정하게 손을 얹고 말했다. "결손가정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어렵고 힘들게 자란 것 다 안다. 힘들겠지만 문제 일으키기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도록 하라"고. 말끝에 한 마디 힘주어 오금 박는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결론인즉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학교 다니라"는 말이었다.

내가 온통 그늘뿐이었으므로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시인의 말이 온전하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시인이 정말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은 두 번째 행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였을 것이다. 나만 그늘이라 생각하고 살았으나 살아보니 인간은 누구나 그늘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마지막 행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라는 시인의 말이 가슴으로 와 닿았고, 누군가의 눈물을 나역시 닦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 시를 처음 접하고 냉랭하게 바라보았던 그 시절로부터 이 시를 다시 가슴으로 품을 수 있게 되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마도 그 세월을 우리는 흔히 성숙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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