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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진은영 - 70년대산(産)


70년대산(産)



- 진은영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출처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 2008년


*


▶ 영화 <주먹이 운다> 중에서

주변에 복서를 했던 친구가 있던 덕에 잠깐이었지만 권투를 배웠다. 프로선수로 한두 번 링에 오른 뒤 권투하고는 영영 이별하고 뱃사람이 되겠다고 해대에 진학했다가 그것도 싫다고 그만두고 치기공사가 되어 이제는 이름조차 잊혀졌다. 나는 그에게 권투를 배우며 약간이나마 인생을 알 것 같았다. 상대에게 가장 빠르게 가 닿을 수 있는 주먹질은 스트레이트, 곧게 내뻗는 주먹이다. 어퍼컷이 멋있어 보이지만, 훅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권투에서 가장 매서운 주먹은 스트레이트다. 그러나 상대를 KO시키기 위해 가장 필요한 주먹은 잽이다. 푸트웍을 하며 가볍게 상대를 겨냥해 빙빙돌며 잽을 날린다.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질하며 가볍게 가볍게 잽을 날린다. 쉬지 않고 잽을 날린다. 쉬지 않고 잽을 날리는 이유는 꼭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KO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권투 선수 중에 누구도 나는 상대에게 한 방도 얻어맞지 않고서도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한 방이라도 적게 맞으려고 잽을 날리고, 잽을 날리다 보면 결국 누가 먼저 지치고, 누가 먼저 빈틈을 보이느냐는 것이다. 세상 일도 그렇다. 내가 목숨을 걸고 덤비는 일이란 목숨이 하나뿐인 내겐 대단한 일이겠지만 남의 목숨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세상에겐 그저 하나의 목숨일 뿐이다. 인생은 한 방이 아니라 잽이다. 그것도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날릴 수 있는 잔주먹질.

사실 우리는 그 잔주먹질을 쉬지 않고 날릴 수 있는 체력과 맷집을 기르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뛰고 또 뛰는 것이다. 고작 3분 1라운드를 뛰기 위해 그토록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나서도 그것이 좋다면 그 때 목숨을 걸라고 말해도 좋겠지.

시인은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아무리 열심히 써도 주목해주지 않고, 귀기울여 주지 않는다. 내내 기다리다 서로를 쏴버린다는 상황에서 얼마전 열심히 글을 쓰다 결국 굶어죽고 만 한 극작가의 죽음이 가슴 아프게 중첩된다. 어쩌면 이것 또한 시대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예술가의 숙명일 테지만, 이것을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세상에 대해 우리는 또 다시 목숨을 걸고 쓰지 않으면 안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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