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안에 사람이 산다
- 함순례
도배 새로 하면서 감쪽같이 그를 봉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고요를 흔들고 가는 그가
슬쩍 귀찮았던 것인데
옥상 난간엘 두 번씩이나 오르내린 사춘기 아들 쓸어안고
먹장처럼 깜깜한 날
벽지 한 장의 긴장을 뚫고 또 그가 왔다
꽃무늬 가면을 쓰고 저리 또렷한 소릴 내다니!
굵고 지긋하신 목소리가
내 안의 둥그런 물관 같은
피붙이, 어린 슬픔을 파고들어서
얼굴 없는 그를 아득히 올려본다
매번 차임벨로 노크를 하고
헛기침 두어 번으로 가다듬지만
밤잠 설친 듯 목소리 탁할 때 있는 걸 보면
그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나는 딴살림
휘파람 불며 스쳐가도 그만인
내 눅진한 살림의 안쪽으로 줄기차게 말을 건네는
저 지극함은 무언가
딴살림 챙기며 늙어가는 그의 본색은 벽 안 살림
어리석은 내가 끝내,
봉인할 수 없는
<출처> 함순례, <실천문학> 2009년 여름호(통권94호)
: 1966년생, 1993년 <시와 사회>로 등단, 시집 <뜨거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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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심심파적 삼아 이런 궁리, 저런 궁리 해보다가 막연한 공상이 공상을 넘어 이승으로 넘어올 때가 있다. 근대와 전근대를 나누는 근거로 '사진기(카메라)'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를 문제삼아도 좋으리란 생각, '나지오(라디오)' 속에 작은 사람이 들어가서 말한다고 믿는 사람과 그것이 멀고도 먼 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고, 트랜지스터를 통과하여 자석의 수만 번 떨림으로 다시 육성으로 변환된다는 과학적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분류해도 좋으리란 생각을 한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히면 사진에 찍힌 사람의 영혼이 사로 잡힌다는 생각, 과학적으로야 우스운 망상이겠지만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겐 끔찍한 일이다. 가끔 사진 찍히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 그들의 변명을 듣노라면 대개 '다 늙어서 사진은 찍혀서 뭐할라고...', '예쁘게 안 나오더라고...', '찍어도 주지 않을 거면서...' 라고 하지만 - 실은 그런 생각을 적지 않이 하게 된다. 사실, 당신은 당신의 한 순간을 담은 사진을 통해 오래도록 내게 기억될까봐 두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인천에 있는 이민사박물관엔 한 세기쯤 전에 신랑 될 사람의 사진 한 장 달랑 들고서 멀고먼 이역만리로 결혼하기 위해 떠나가는 신부들의 사진이 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게 어린 아가씨가 신랑 사진 한 장만 들고서 인천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짐처럼 실려서 현해탄을 건너고, 그곳에서 다시 태평양을 가로질러 하와이로, 멕시코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신랑은 사진 속의 그 젊고 푸른 청년이 아니라 어느덧 쉰 살도 넘어버린 중늙은이였다. 그들이 보내온 사진은 조선에서, 일본에서, 하와이, 멕시코에 갓 도착한 직후에 촬영한 사진이었다.
그 멀고먼 이역에 뿌리내리고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 밤낮으로 시달리는 동안 이십대 젊은 청년들은 어느덧 쉰 살, 이십대 젊은 처자들은 그들이 과거에 보내온 청혼 사진을 받고 부름에 응한 것이다. 처음 그들의 청혼이 시작된 것은 그네들이 태어나기도 전이었거나 아니면 이제 막 태어나 옹알이를 하고 있던 무렵이었을 테지만 사진은 그와 같은 세월의 간극쯤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넘어서버렸다. 이처럼 사진은 시공간을 초월하거나 추월해버린다.
라디오 속, 스피커 속에 작은 사람(들)이 숨어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깜찍한(?) 상상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엄지공주>, <닐스의 대모험>처럼 작은 존재들을 긍정하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상상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말고도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긍정과 포용 속에서만 가능한 상상이다. 시인은 벽을 파내고 얕게 삽입된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일방적인 통지가 듣기 싫었을 수도 있고, 돌출되어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스피커 박스가 보기 싫었을 지도 모른다. 시인은 새로 도배를 하면서 스피커 박스도 통째로 봉해버린다.
그런데 꽃무늬 벽지의 얇은 긴장을 뚫고 그가 말한다. "그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그 순간 시인과 스피커 저 편의 낯 모르는, "굵고 지긋하신 목소리"의 주인공이 생환한다. 스피커 전선으로 연결된 이집저집 딴살림 챙기며 살아가는 벽 안 살림, 나에게도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다며 들려오는 그 목소리. "끝내 봉인할 수 없는" 살림의 목소리. 거기엔 과학이나 합리로 풀어낼 수 없는 공감과 연민, 포용과 연대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예전엔 집집마다 콘크리트 거푸집으로 찍어낸 쓰레기통이 있었는데 해마다 세밑이면 어머니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쓰레기 치우는 아저씨가 다녀가는 기척을 유심히 살피곤 했다. 혹시라도 당신이 나모르게 다녀가지 않을까, 세밑에 푼돈 몇 푼이라도 쥐어주려고, 신새벽 잠을 설치며 일어나 대문 앞으로 오갔다. 그렇게 만나 쥐어주는 당신이나 받는 당신이나 결코 푼돈이 아니었을 돈 몇 푼 서로 주고 받으면서도 유난하게 감사해 했고, 받는 아저씨도 황송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도, 아파트 관리비에서 수위아저씨에게 나갈 월급 떼듯, 쓰레기 치우는 세금은 따로 냈건만 어머니들은 그래도 사람 사는 정이라고, 우리 집 쓰레기가 제법 많이 나온다고 미안해 하며 봉투에 담아 그렇게 인정을 건넸다. 당신 하는 일이 원래 그거 아니냐고 하기 전에 당신은 먼저 "거둬야 할 식솔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므로... 지금 매사 합리적이라 조금도 손해보기 싫은, 모든 관계가 자본주의적으로 고용과 피고용 관계로 변해버린 우리에게는 없는 그 '정'이 근대와 전근대를 나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