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하룻밤의지식여행12) - 지아우딘사르다르 | 이영아 옮김 | 김영사(2002)
나는 이런 식의 도서에 익숙한 편이다. 그러니까 80년대 말엽에서 90년대 초엽 사이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던 리우스의 만화책들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엔 사회과학 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던 "오월"에서 "리우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멕시코의 좌파 만화가)가 이런 식의 작업들을 통해 일련의 만화 책들을 시리즈로 간행했다. 사회과학 이론의 빡빡함에 미리부터 질려버린 까닭으로, 혹은 좀더 쉽게 입문하기 위한 방편에서 이 책을 선택했던 이들에겐 상당한 도움을 준 책이다. 리우스는 "쿠바혁명과 카스트로", "레닌", "체 게바라" 등 혁명가들의 생애와 사상, 그들의 이론을 나름대로 잘 요약해주었다.
김영사에서 펴내고 있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중 한 권을 읽었다.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그것인데, 얼마전 누군가가 이 책은 아니고 이 책의 한 시리즈 중 노암 촘스키 편에 대해 썼던 리뷰도 있었지만, 이 책 혹은 이 시리즈 중 어느 책이든 선택하는 사람이라면 머리 속에서 "하룻밤"이란 글자를 빨리 삭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룻밤"만에 이 시리즈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을 다 알게 된다거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란 말이다.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면면을 살펴보면 더 빨리 이해될 수 있다.
1권에서 "노암 촘스키", 그리고 연이어 "양자론, 수학, 진화심리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플라톤, 포스트페미니즘(헉, 페미니즘도 어려운데 거기에 붙였다 하면 뭐든 세 배는 더 어렵게 만드는 "포스트"까지 붙어 있다. 나는 "포스트"자가 붙은 건 심지어 시리얼 메이커까지도 싫어지더라구.), 이슬람, 문화연구, 기호학, 프로이트, 라캉, 융, 호킹, 정신분석, 데리다" 그리고 앞으로 "푸코" 도 낸다고 한다. 앞서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해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긴 했지만, 한 가지 개념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앞에 접두사가 붙는 학문은 더욱 어렵다. 예를 들어 아동문학이 그냥 문학보다 어려운 까닭은 그 앞에 아동이 붙기 때문이다. 아동을 알아야 하고, 문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허투루하면 모를까, 진짜 아동문학을 잘 하기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보다 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하기사 무엇이든 제대로 하기란 참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룻밤의 지식여행"이란 기획으로 정말 하룻밤만에 끝낼 수 있을까?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사기라고 해야 할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대로만 해준다면 그래서 그 여러 개념들이 대관절 어떤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지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면,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룻밤이란 말만 지워버리고 시작한다면 나름대로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지아우딘 샤르다르의 "문화연구"는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도움이 된 책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화"는 "영화"만큼이나 대중적인 화두이다. 문화에 대해 한 두 마디쯤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인이 어느날 갑자기 문화평론가로 등장해서 TV에서 그럴듯한 해설을 읊조리는 광경이 더이상 낯설지 않다. 문화는 방금나온 따끈한 빵처럼 말랑거려서 누구라도 손쉽게 조물딱거리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학문 분야처럼 보인다.
거기에 대중문화란 말이 붙으면 더 쉽게 느껴진다. "대중문화 = 저급문화, 상업문화"란 등식이 존재하다보니 누구나 쉽게 즐기고,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으니 그걸 공부하는 일도 쉬우리라 생각하게 된다. 문화연구의 함정이 거기에 있다. 문화는 도처에 있고, 누구나 즐기는 것이기에 어디에도 없고, 누구도 해석하기 어렵다(반대로 누구나 해석할 수 있기도 하다). 누구나 잘 아는 듯 여기지만 막상 말로 그것을 정의하고, 그 안에 숨겨진 여러 함의들을 찾아 해석해내고, 연구하는 범주 안으로 들어가면 미노타우르스의 미로처럼 얽히고 섥?것이 (대중)문화란 것을 금방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문화연구의 이론(가)들을 살펴보자.
맨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미국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여사, 그리고 문화연구의 창시자로 손 꼽히는 레이먼드 윌리엄스, 사회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다. 문화연구는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이론과 방법론들을 빌려와서 제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즉, 대충 몰라도 넘어갈 수 있는가하면 제대로 걸리면(혹은 제대로 하려면 이 모든 것들을 손대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거다) 금방 밑천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소쉬르, 로만 야곱슨,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기호학, 키플링, 포스터와 같은 문학, E.P.톰슨 같은 역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같은 20세기 메타 이론에서 다시 이들을 뿌리로 하여 등장하는 알튀세르, 그람시, 리오타르, 부르디외에서 스피박에 이르는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CPU과열현상을 빚는 인물들이 즐비하다.
그러니 이 책을 하룻밤만에 읽고 끝낸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도 나름대로 유의미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짤막한 요점 정리를 통해 문화연구의 다종다양한 분야의 개념들과 연구자들, 그들이 문화연구란 거대한 테마 속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데는 아주 괜찮은 지도책이란 사실이다. 지도에는 온갖 기호들로 거리와 위치, 통과해야할 도로의 번호들이 명시되어 있다. 물론 지도책 없이 헤매면서 찾아가도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목적은 이룰 수 있다.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더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드네의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이었듯, 비록 이 책이 건네주는 실오라기는 가늘고,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문화연구의 미로를 헤매는데 꽤 믿을 만한 나침반 아니, 그 지도 상에 아로 새겨진 기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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