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쭉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 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출처> 박라연,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문학과지성사(1996)
*
아침저녁 산업도로를 타고 출퇴근하는 동안 누군가에게 무선(無線)전화를 걸고, 전화가 걸려와 이야기하지 않는 동안, 나는 줄곧 '죽음'에 대한 상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 파르르 떨리는 운전대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은 죽음이 갈대처럼 떨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상상한다.
결혼한지 10년만에 아내의 자궁에 내 아이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었을 때도, 태어나서 한 번도 내 머리를 뉘어둘 집이 없었던 내가 아파트에 당첨되었을 때도, 오랫동안 꿈꿔왔으나 막상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책을 낼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그 책이 나왔을 때도 나는 아침저녁 산업도로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죽음'을 상상했다. 온몸을 파르르 떨면서 너무 많은 걸 가지고, 너무 많은 걸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그대의 목소리가 무선(無線)이듯 나와 세상도 무선(無線)이다. 나의 육신은 너무나 무겁고, 영혼은 가볍다. 육신은 내 영혼을 가두는 감옥, 지상에서 나의 영혼은 너에게 세들어 살고 있다. 죽음이란 만기출소를 향해 오늘도 나는 산업도로를 달린다. 파르르 떨리는 너의 진동을 손끝으로 감지하며 나도 함께 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