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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강영은 - 오래 남는 눈

오래 남는 눈

- 강영은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출처 : 강영은, "녹색비단구렁이", 종려나무

*

강영은 시인의 이 시는 참 재미있는 과장으로 시작된다.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저 바다가 없었다면 그대와 나의 이별은 없었을 것'이라는 철지난 대중가요에 나오는 과장법과 흡사하다. 바다가 있어서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하는 장소가 항구이거나 물 건너 외국으로 가는 것뿐인데도, 이별하는 남녀는 마치 애꿎은 바다가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탓을 한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그걸로 끝이지만 시 <오래 남는 눈>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뒤꼍이 없었다면 시누대도 없었을 것이고, 시누대가 없었다면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도 없었을 것이다. 또,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잠 못들게 하는 밤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잠 못드는 깊은 밤이 만들어 낸 그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늘을 알지 못했다면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상은 심경의 확장과 풍경의 축소를 반복하며 스무고개를 넘어가듯,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다. 내게 그늘이 없었다면 남의 그늘을 어찌 살필 수 있을까? 남의 그늘을 살필 수 없는 자가 어찌 자신의 그늘을 되돌아 볼 수 있으며 그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거다. '사랑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누군가의 뒤꼍을 사랑할 수 없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라! 누군가의 뒤꼍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늘을 내 안에서 키워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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