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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함민복 - 자본주의의 약속

자본주의의 약속

- 함민복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일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이야기이거나 '네모난 상자 속에 담긴 양의 그림' 이야기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한 것은 제라늄 화분이 있는 집과 50만 프랑짜리 집 이야기다. 사람들은 제라늄 화분이 있는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는 이야기보다 50만 프랑짜리 집 이야기를 할 때 더 솔깃해 한다. 얼마 전 나는 오랫동안 부어오던 주택청약저축으로 주공아파트 분양 신청을 했다. 운이 좋아서 당첨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묻는 말이 첫 번째는 몇 평이냐? 평당 분양가는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물었을 테니 그들을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만약 이사를 가게 된다면 그동안 익혀두었던 집 뒤 편의 약수터가 있는 산과 영 이별이란 생각에 서운하기 그지없다. 산 밑 동네에서 태어나 산 밑 동네를 전전하며 살다보니 산이 없는 곳에 가서 살게 될 것이란 사실이 미리부터 어색하고 서운하다.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비 내리는 숲 길, 밤중에 나무들이 토해내는 숨결을 맡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이 견디기 힘들다.

나는 함민복 시인을 보면서 참 어려운 시를 쓴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사실, 자연을 떠나 도회에 살면서 도회지 사람들의 삶을 시로 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도회지 사람들의 삶은 자연과 괴리된 뿌리없는 삶이며 휘발성이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시에도 있다. 혜화동 대학로 나와서 '장미빛 인생'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까? 없다! 학림다방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던가? 있는지 없어졌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최소한 옛사람들이 기억하는 그 모습은 아니다. 이 시에서 등장하는 것 중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건 '혜화동 대학로'란 지명뿐이다. 시인이 반체제인사는 아니지만 도시가 반인간적인 건 확실하다. 한국이란 개발주의 토건국가 도시에서 인간의 기억이나 추억은 깃들 곳을 찾지 못하고 늘 저승을 떠돈다.

지금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자본주의의 약속', '자본주의의 약속'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이 시가 백년 후에도 여전히 괴테나 이백의 시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때쯤 도시와 도시인들의 삶은 또다른 저승을 헤매고 있을 텐데? 시인이라고 이런 시를 쓰고 싶어 쓰는 것은 아닐 게다. 다만, 현재 우리의 삶이 또한 그러하기에 시인도 그리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처럼 흔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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