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모든 '시(詩)'의 기본은 '연애(戀愛)'라고 배웠다. 그리고 그 사랑(戀愛)의 기본은 그리움(戀)이다. 그리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리움'의 기본적인 감각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아이 만드는 밤을 함께 지새우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랑은 '하다'로 표기되지만 사랑을 이루는 근본적인 감정인 '그리움'의 원천적인 감각은 '보고 싶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따라서 '사랑'은 '하다' 보다는 '보다'라는 감각에 좀더 접근되어 있는 감정이다. 한국말의 쓰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말 중 하나인 '하다' 보다 더욱 많은 쓰임의 예가 있는 말이 '보다'이다. 그러나 '보다', '본다'는 말은 식물성의 느낌을 준다.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흔히 '한 번 보자'고 말하지, '한 번 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약간의 농이 섞인 말이긴 하지만, '하자'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목적을 지니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으로 들리는 것에 비해서 '보자'란 말은 그와 같은 구체성을 지니지 못한다. '하다'란 말이 구체적인 목적을 지니는 것에 비해 '보다'란 말이 더 함축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나를 왜 사랑하느냐?'고 묻는 이에게 '나는 당신이 섹시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그런 말을 듣는 이라면 상대방이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서로 영원히 작별할 때, 흔드는 손은 활짝 펴지지 않는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손이 무언가 잡고 있는 것처럼 꽉 오므려져 있는 것처럼 그리운 이를 마지막 보내는 손은 아쉬움으로 인해 활짝 펴지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존재(메일이든, 사진이든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보고 알고 느끼고 있는 것과 달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지고지순한 사랑의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립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 글에서 정의하는 사랑, 다시 말해 연애가 될 수 없다. 이렇듯 사랑은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완성되었다거나 충족된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사랑이 완전한 면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플라토닉 러브'라 하는 사랑의 한 측면을 일컫는 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보고 있어도 당신이 그립다'는 표현이 있듯 사랑은 보는 것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사랑이 단순히 상대방을 본다는 의미에서 그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본다'는 것은 바라보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는 대상이 반드시 남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사랑은 '타아'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자아'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라보지만, 같은 곳을 본다는 것은 나의 시선과 상대의 시선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때때로 엇갈리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주보고 있는 동안, 두 연인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할 때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엇나간다. 한 사람은 '달'을, 다른 한 사람은 '손끝'을 보거나, 두 사람은 각기 '해'와 '달'을 가리킬 수도 있고, 눈을 감을 수도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각기 다른 자아를 지닌 두 존재가 하나의 의지 아래 다른 하나의 의지를 합치시킬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성복 시인은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라고 노래한다. 사랑이 그 어떤 감정보다 폭발적인 까닭은 서로 다른 두 사람, 그리워하는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섹스'다. 섹스와 군중심리는 감정의 전이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혁명의 열기가 분출되는 극적인 순간, 공동체가 각각의 개인을 감싸고 있는 정신적 결계의 '해방'을 맛보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여기게 되는 것처럼 연인에게 그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영원히 혁명하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 또한 영원히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는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그립고, 그립기에 사랑이고, 그리움만으로 상대를 온전히 가질 수도, 느낄 수도 없기에 사랑은 미완이다. 사랑은 영원히 미완이기에 혁명과 닮았다. 그것은 돌고 돌고 돌고, 돌아가는 윤회의 고리와 같다. 가져도, 가져도,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그리움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동안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꽃피는 시절'이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온갖 악다구니를 쓰면서도 사랑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사랑도, 혁명도 알고보면 외로운 자들의 몫이다.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모든 '시(詩)'의 기본은 '연애(戀愛)'라고 배웠다. 그리고 그 사랑(戀愛)의 기본은 그리움(戀)이다. 그리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리움'의 기본적인 감각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아이 만드는 밤을 함께 지새우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랑은 '하다'로 표기되지만 사랑을 이루는 근본적인 감정인 '그리움'의 원천적인 감각은 '보고 싶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따라서 '사랑'은 '하다' 보다는 '보다'라는 감각에 좀더 접근되어 있는 감정이다. 한국말의 쓰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말 중 하나인 '하다' 보다 더욱 많은 쓰임의 예가 있는 말이 '보다'이다. 그러나 '보다', '본다'는 말은 식물성의 느낌을 준다.
우리는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흔히 '한 번 보자'고 말하지, '한 번 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약간의 농이 섞인 말이긴 하지만, '하자'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목적을 지니기 때문에 매우 구체적으로 들리는 것에 비해서 '보자'란 말은 그와 같은 구체성을 지니지 못한다. '하다'란 말이 구체적인 목적을 지니는 것에 비해 '보다'란 말이 더 함축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나를 왜 사랑하느냐?'고 묻는 이에게 '나는 당신이 섹시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그런 말을 듣는 이라면 상대방이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서로 영원히 작별할 때, 흔드는 손은 활짝 펴지지 않는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손이 무언가 잡고 있는 것처럼 꽉 오므려져 있는 것처럼 그리운 이를 마지막 보내는 손은 아쉬움으로 인해 활짝 펴지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존재(메일이든, 사진이든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보고 알고 느끼고 있는 것과 달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지고지순한 사랑의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립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 글에서 정의하는 사랑, 다시 말해 연애가 될 수 없다. 이렇듯 사랑은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완성되었다거나 충족된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사랑이 완전한 면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플라토닉 러브'라 하는 사랑의 한 측면을 일컫는 말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보고 있어도 당신이 그립다'는 표현이 있듯 사랑은 보는 것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사랑이 단순히 상대방을 본다는 의미에서 그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본다'는 것은 바라보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는 대상이 반드시 남이라고 할 수는 없기에 사랑은 '타아'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자아'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라보지만, 같은 곳을 본다는 것은 나의 시선과 상대의 시선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때때로 엇갈리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주보고 있는 동안, 두 연인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할 때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엇나간다. 한 사람은 '달'을, 다른 한 사람은 '손끝'을 보거나, 두 사람은 각기 '해'와 '달'을 가리킬 수도 있고, 눈을 감을 수도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각기 다른 자아를 지닌 두 존재가 하나의 의지 아래 다른 하나의 의지를 합치시킬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성복 시인은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라고 노래한다. 사랑이 그 어떤 감정보다 폭발적인 까닭은 서로 다른 두 사람, 그리워하는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섹스'다. 섹스와 군중심리는 감정의 전이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있다. 혁명의 열기가 분출되는 극적인 순간, 공동체가 각각의 개인을 감싸고 있는 정신적 결계의 '해방'을 맛보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여기게 되는 것처럼 연인에게 그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영원히 혁명하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연인 또한 영원히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는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그립고, 그립기에 사랑이고, 그리움만으로 상대를 온전히 가질 수도, 느낄 수도 없기에 사랑은 미완이다. 사랑은 영원히 미완이기에 혁명과 닮았다. 그것은 돌고 돌고 돌고, 돌아가는 윤회의 고리와 같다. 가져도, 가져도,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그리움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동안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꽃피는 시절'이다. 우리가 사랑 때문에 아프고, 괴롭고, 힘들고, 온갖 악다구니를 쓰면서도 사랑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혼자이고 싶지 않아서...사랑도, 혁명도 알고보면 외로운 자들의 몫이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동호 - 비와 목탁 (3) | 2011.03.23 |
---|---|
박제영 -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3) | 2011.03.22 |
황지우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1) | 2011.03.21 |
이승하 - 사랑의 탐구 (1) | 2011.03.18 |
김정환 - 구두 한 짝 (1) | 2011.03.17 |
고영민 - 나에게 기대올 때 (1) | 2011.03.15 |
이승하 -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1) | 2011.03.11 |
강연호 - 감옥 (1) | 2011.03.10 |
조용미 -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1) | 2011.03.09 |
강윤후 - 쓸쓸한 날에 (1) | 2011.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