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한국시

황지우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비가 그친 새벽 산에 머물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산의 등허리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라가는 하얀 김... 산 중턱엔 하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산 아래로 내려온 나는 방금 전 선계에서 유배된 불쌍한 중생이다. 산이 하늘에 두고 온 섬이라면 나는 수중의 고혼이 된 셈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이 참 멋지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희망조차 비우는 것이 날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희망이나 절망이야말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일지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볼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