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을 가며
- 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철공고 졸업 1991년 육군 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
이력서를 써본지 오래 되었다. 그 덕분에 낡아빠지고 덜덜거리며 어디에서 멈출지 모르는 자가용을 굴린다. 이력서의 내용을 살펴본지 오래 되었다. 그 덕분에 월급이 자동으로 이체되는 통장에 돈이 쌓이고, 아내는 나몰래 야금야금 돈을 빼간다. 나도 아내 몰래 비상금 통장을 만들어 조금씩 비상시에 대비한다. 이력서 대신 사직서를 써놓고 가끔씩 직장 생활에 신물이 넘어올 때마다 펼쳐놓고 읽는다. 이거 하나만 집어던지면 십수년 청춘을 다 바친 세월은 말짱 황이 되지만 황금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는 몰라도 까마귀처럼 잠시 어디론가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력서를 써본지 오래 되었다. 이력서 내용도 살펴본지 오래 되었다.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은지 오래 되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기억하지 않게 된지 오래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잊은지 오래 되었다. 오래 전의 나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잊은지 오래 되었다. 나는 누구인지 잊은지 오래 되었다.
기억의 먼지까지 탈탈 저당잡힌지 오래 되었다. 내 삶이 한 장의 이력서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지만 이력서조차 없다면 그마저도 기억에 남을 일이 없다는 걸 깨닫는 건 더 끔찍한 일이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