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아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서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출처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시인선16, 1989
*
최승자의 시에서 발견되는 - 이건 발견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다. 이토록 줄줄 흘리고 다니는데 발견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 혹은 노출에 가까운 정조는 '자학'이다. 그런데 최승자의 시가 지닌 미학의 정점은 단순히 자학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학하듯 말하지만 최승자의 시에서 실제로 노래하는 것은 노출의 쾌감이다. 내 안의 어둠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최승자의 시는 보여준다. 봐라! 나는 어둡다. 봐라!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하지만... 나는'이라고 반전될 때 최승자의 시는 영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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