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
- 백무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노동은 인질로 잡혀갔다
납치범들은 총칼로 인질을 위협하며
흥정을 하는데 써먹었다
그러다가 납치범들은 더 큰 마피아
소굴의 나라에 통째 납치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두 번씩 빼앗겼다
노동법도 빼앗겼다
노동삼권도 빼앗겼다
깃발도 빼앗겼다
함성도 빼앗겼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이 되었다
그래서 납치범들은 주인을 자처했다
거리마다 여전히 4월의 피는 흐르고
거리마다 여전히 5월의 흰 뼈들은 굴렀다
6월의 거리를 소나기로 퍼부으며
우리는 납치범들을 몰아내고자 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돌려받기 위해 싸웠다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최루탄을 쏘고 군화발로 짓이기며
과격시위를 하였다
쇠몽둥이를 들고 곤봉을 휘두르며
극렬시위를 하였다
공장 앞에 몰려와
극렬하게 데모를 하였다
노동자들은 진압에 나섰다
저들의 살상 무기를 막자고
지게차가 나섰다 포크레인이 나섰다
깃발을 들고 함성으로 나섰다
주인인 노동자들은 피흘리며 진압에 나섰다
<출처> 백무산,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
오래된 시집을 다시 꺼내 읽는다. 1993년 3월 23일. 나는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를 구입하여 읽었다.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느꼈던 통쾌함, 자본과 권력의 졸개가 된 언론은 언제나 불법, 폭력 시위의 주체로 노동자와 시민들로 몰아갔는데 백무산 시인은 경찰이 주인인 시민들과 노동자들 앞에서 데모를 한다고 말한다. 1987년까지 교과서는 4.19를 의거로, 5.16을 혁명으로 가르쳤고, 광주는 폭동이었다. 이 시가 선사하는 주체와 객체의 전복이 주는 쾌감이야말로 혁명의 맛이 아닐까.
21세기가 되어 다시 백무산을 읽는다. 젊은 백무산의 시를 내 나이 마흔줄에 다시 읽는다. 민중문학은 구호의 선명성으로 인해 문학성이 떨어진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배웠다. 나 역시 이 시집을 잘 포장해서 교수님 눈치보며, 쪼그려 앉아 읽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은 세상이 참 단순했다. 누구나 비분강개할 줄 알았고, 누구나 거리를 내달리는 쾌감을 알았다. 다시 백무산을 읽는다.
끓는 피는 이미 식어버린지 오래 다시 백무산을 펼쳐 읽는다. 세상은 참으로 복잡하고 내 마음도 따라서 복잡해진다. 생각이 복잡하면 주먹 휘두를 곳을 찾아내지 못하는 법인데...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바탕에는 사무직과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격차와 차별이 깔려 있었다. 이제 그 천만 노동자는 다 어디로 가고 비정규직 노동자만 남았는가. 이제 그 함성에 답할 사람 어디에도 남지 않아 메아리조차 맥 없이 공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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