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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신경림 - 갈구렁달


갈구렁달


- 신경림


지금쯤 물거리 한 짐 해놓고

냇가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볼 시간......
시골에서 내몰리고 서울에서도 떠밀려
벌판에 버려진 사람들에겐 옛날밖에 없다
지금쯤 아이들 신작로에 몰려
갈갬질치며 고추잠자리 잡을 시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로 외쳐대고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몸짓으로 발버둥치다
지친 다리 끄는 오르막에서 바라보면
너덜대는 지붕 위에 갈구렁달이 걸렸구나
시들고 찌든 우리들의 얼굴이 걸렸구나



* 갈구렁달 : 황해도, 충청도 바닷가에서 쪽박같이 쪼그라든 달을 말함.


**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들을 죄다 뜯어 고치겠다는, 아니 고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다 언제인가부터 싫든 좋든 나도 그 세상 풍경의 일부란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이 세상의 문제들에 책임질 나이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늙어가기 시작했으리라.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은 10개월이 지나면 끊어지지만 과거 성장하며 겪어왔던 어려움들은 어느 순간 극복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탯줄처럼 줄곧 내 뒤를 따라왔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시들고 찌든 우리 얼굴처럼 시든 갈구렁달이 줄곧 내 뒤를 따라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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