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한국시

김수영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 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는 나보다도 훨씬 늙었는데
그는 나보다도 눈이 들어갔는데
그는 나보다도 여유가 있고
그는 나에게 공포를 준다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
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돼간다
俗돼간다  俗돼간다
끝없이 끝없이 동요도 없이

(1964년)

*


김수영을 일컬어 한국 현대시의 신화라고도 부르지만 아마도 이런 호명법에 대해 김수영 자신은 그다지 마뜩지 않게 여겼으리란 생각이다(개인적으로는 나역시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인 김수영은 물론 그처럼 높이 평가받을 만한 시인이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그가 이런 평가를 마뜩지 않게 여겼을 것이란 사실은 김수영의 시 세계가 바로 신화 혹은 그 자신을 포함해 무엇이 되었든 덧씌우고 포장하는 코스튬을 경멸해 왔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에서 자아는 거의 대부분 자아 과잉 상태에서 거울 혹은 도마 위에 올려진다. 이 시 "강가에서" 역시 첫 구절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로 시작한다. 시적 자아는 타인을 통해서 혹은 그 자신의 자아에 의해 분석대상이 되고 있다. 시 속의 '저이'는 '나'보다 가난해 보이지만 여유가 있고,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이나 많지만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줄 만큼 호기롭다. 그리고 그는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오고, 반드시 4킬로미터 가량을 걷는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이는 '애 업은 여자'와 오입한 자신의 부도덕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애 업은 여자와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오입할 수 있었던 자신의 성적 능력을 아무 고민 없이 자랑할 만큼 속물이다. 게다가 그는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시적 자아는 그와 나를 비교하면 할수록 안으로부터 파괴된다. 나의 어조는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비교하고 있으나 그는 이미 나의 염치나 윤리의식 따위 개나 물어가라는 식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던가? 그에게 그런 의식 따위 없으니 도리어 부끄러워진 건 '나'이다. 그런데 이 '나'는 사지육신 멀쩡한 나(자아)인가?

이런 사람을 보면 세상사람들이 다 그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나같이 사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낄 만큼 왜소해진 '나'이다. "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 자꾸자꾸 小人"이 되어가는 나를 김수영은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선이 너무나 생생하고, 신선해서 마치 금방이라도 바닷속에서 끄집어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린다는 거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초저녁에 두 번 새벽에 한 번
그러니 아직도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이토록 파괴적인 정황을 시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쓰고 있는 김수영의 정직함은 무시무시하지만, 그가 느꼈을 위선과 암울한 시대가 또한 그를 사정 없이 내몰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제림 - 길  (0) 2011.09.22
백석 - 여승(女僧)  (0) 2011.09.21
나태주 - 산수유 꽃 진 자리  (0) 2011.09.19
강영환 - 여름에 핀 가을꽃  (0) 2011.09.14
김사인 - 늦가을  (2) 2011.09.09
마종기 - 證例6  (0) 2011.09.07
오세영 - 비행운  (0) 2011.08.18
안현미 - 여자비  (2) 2011.08.17
신경림 - 갈구렁달  (0) 2011.08.12
윤성학 - 내외  (0) 2011.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