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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사인 - 늦가을

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요즘 시인들은 왜 달에 대한 멋진 시 하나 토해내지 않는 건지. 제가 가장 마지막에 주목했던 소설가는 "마루야마 겐지"였습니다. 이 말은 최근엔 소설을 읽지 않는 제 현실의 문제이죠. 어쨌거나 그의 소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는 참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낡은 오토바이를 사서 한계령도 넘고, 한반중에 동해안 모래 사장도 달려보고 싶었지만 울애인이 다른 건 다 되어도 그것만큼은 허용해줄 수 없고 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김사인의 이 시를 읽고난 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이 한창 때 연애 좀 하지 않았을까. 저는 마지막 행에 가서 폭발하는 시를 좋아하는 편인데, 김사인의 <늦가을>은 특히 첫 구절이 매력적입니다.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라는 구절 말이죠. 시에서 노래하는 대상은 불혹을 넘긴 중년의 여성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남과 북을 모두 통틀어 고달프기 마련입니다(예전에 <북한의 여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란 책을 읽었는데 남한에 비해 반드시 평등하다고 말할 순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간 시인은 늦가을을 불혹을 맞은 여성에 비유한 건지, 불혹을 맞은 여성을 늦가을에 비유한 건지 몰라도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긴 있어 보입니다. 늦가을. 9월에서 11월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면, 늦가을은 11월에 해당하겠죠.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에 숲속에 가보셨나요. 11월의 가을 숲속은 추워요. 술먹고 그런데서 잠들었다간 입 돌아가기 딱이죠. 오한이 들죠. 바람도 차갑고... 그런 적막천지 한밤중에 머리를 감는 여자.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외롭다는 감정은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어젯밤엔 갑자기 잠이 안 오더군요.


잠자리에 든 아내를 깨워 자유로라도 나가보자고 꼬셨습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자정 무렵... 문득 여전히 달이 내 뒤를 쫓는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자고 쿨쿨... 잠이 오지 않아 부대끼는 밤에 문득 일산 가던 길에 내 뒤를 쫓던 커다란 달이 그리웠어요. 사랑은 어느덧 늦가을에 접어들어 오한이 들고, 주춤주춤 고무신을 옮겨보아도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지요. 잠도 오지 않는 밤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뭅니다. 이유야 어쨌거나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내일모레 불혹을 바라보는 사내가 창 밖을 바라봅니다.


늦가을엔 정말 쓸쓸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가 들 수록 나의 세상은 깊어지겠지만 그 세계에 깃드는 사람이 없으면 참말 쓸쓸할 거예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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