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
"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시들은 따사롭다. 얼핏 생각없이 바라보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따사롭기 그지 없어 예쁘기만 한 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의 따사로운 시어들을 곰곰이 씹고 있노라면 따사롭기 그지없는 시가 담고 있는 정신의 한 편은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한 인고(忍苦)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을 가졌는데 누군가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 꽃 옆에서 무심히 중얼거린다는, 얼핏 읽노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안타깝게 여기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만 읽기 쉽다. 그러나 첫 번째 행과 아홉 번째 행에서 반복되고 있는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는 내용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앞서의 말과 뒤에서 반복되는 말 사이엔 시간적 간격이 크다.
첫 번째 행에서 시인의 사랑 고백을 듣는 산수유는 아직 춥고, 쌀쌀한 바람이 피는 3월 초봄에 남들보다 이르게 피어난 산수유 꽃이지만 아홉 번째 행 이후 등장하는 산수유는 볕좋은 봄날과 뜨거운 여름 한철을 보내고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무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산수유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차가운 한기가 미처 떠나지 않은 황량한 산야에서 누구보다 먼저 피어나는 산수유는 샛노랗다.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아직 차가운 날씨에 행동이 굼뜨기 마련인 곤충들을 유혹해 수분을 유도하기 위해 노란 빛을 띈다는데 해마다 춘삼월, 깊은 계곡 시냇가는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그 계절에 남도땅으로부터 들려오는 산수유 소식으로부터 우리는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안다.
개나리가 피어날 때쯤 꽃이 지고, 여름엔 잎만 무성하게 피었다가 우리 모두가 산수유 꽃이 피고 지었던 사실조차 기억에서 잊혀져갈 무렵에야 석조(石棗ㆍ돌대추)라는 별명처럼 작은 대추모양의 예쁘고 빨간 열매가 산수유 꽃 진 자리마다 알알이 맺힌다. 봄의 전령으로 남들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웠던 산수유가 절기상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서야 열매를 맺는다. 상강이란 절기는 가을도 다가고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되어 나뭇잎들도 떨어질테니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라는 절기다. 서리는 입춘(入春) 지나고도 여든 여덟 번의 밤낮이 바뀌고서야 '이별서리'로 그친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추위에 얼어죽지 않고 버티다가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이 산수유나무다.
요즘 세태가 하도 급해서 연인끼리의 사랑도 1000일은 커녕, 100일도 안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풍속도이라고 한다. 성미급한 사람들은 100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만난지 10일, 20일만 되어도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요즘 우리네 사랑 풍습이라고 하는데 산수유는 그래서 기다림의 나무다. 산수유의 꽃말이 '지속ㆍ불변'인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산수유 꽃 진 자리에 빗대어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을 찬미하고 있다.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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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시들은 따사롭다. 얼핏 생각없이 바라보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따사롭기 그지 없어 예쁘기만 한 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의 따사로운 시어들을 곰곰이 씹고 있노라면 따사롭기 그지없는 시가 담고 있는 정신의 한 편은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한 인고(忍苦)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을 가졌는데 누군가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 꽃 옆에서 무심히 중얼거린다는, 얼핏 읽노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안타깝게 여기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만 읽기 쉽다. 그러나 첫 번째 행과 아홉 번째 행에서 반복되고 있는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는 내용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앞서의 말과 뒤에서 반복되는 말 사이엔 시간적 간격이 크다.
첫 번째 행에서 시인의 사랑 고백을 듣는 산수유는 아직 춥고, 쌀쌀한 바람이 피는 3월 초봄에 남들보다 이르게 피어난 산수유 꽃이지만 아홉 번째 행 이후 등장하는 산수유는 볕좋은 봄날과 뜨거운 여름 한철을 보내고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무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산수유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차가운 한기가 미처 떠나지 않은 황량한 산야에서 누구보다 먼저 피어나는 산수유는 샛노랗다.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아직 차가운 날씨에 행동이 굼뜨기 마련인 곤충들을 유혹해 수분을 유도하기 위해 노란 빛을 띈다는데 해마다 춘삼월, 깊은 계곡 시냇가는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그 계절에 남도땅으로부터 들려오는 산수유 소식으로부터 우리는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안다.
개나리가 피어날 때쯤 꽃이 지고, 여름엔 잎만 무성하게 피었다가 우리 모두가 산수유 꽃이 피고 지었던 사실조차 기억에서 잊혀져갈 무렵에야 석조(石棗ㆍ돌대추)라는 별명처럼 작은 대추모양의 예쁘고 빨간 열매가 산수유 꽃 진 자리마다 알알이 맺힌다. 봄의 전령으로 남들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웠던 산수유가 절기상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서야 열매를 맺는다. 상강이란 절기는 가을도 다가고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되어 나뭇잎들도 떨어질테니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라는 절기다. 서리는 입춘(入春) 지나고도 여든 여덟 번의 밤낮이 바뀌고서야 '이별서리'로 그친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추위에 얼어죽지 않고 버티다가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이 산수유나무다.
요즘 세태가 하도 급해서 연인끼리의 사랑도 1000일은 커녕, 100일도 안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풍속도이라고 한다. 성미급한 사람들은 100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만난지 10일, 20일만 되어도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요즘 우리네 사랑 풍습이라고 하는데 산수유는 그래서 기다림의 나무다. 산수유의 꽃말이 '지속ㆍ불변'인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산수유 꽃 진 자리에 빗대어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을 찬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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