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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대우자동차! 노동자는 죄인인가? 3.


 
<독자회생의 걸림돌: 대우차의 취약한 기술능력과 취약한 사업구조-이익구조>

하지만 만에 하나 이와 같은 혁신적인 기업권력(지배구조)이 새로 탄생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우차는 여전히 18조6천억이라는 막대한 부채의 문제를 채권은행과 협상하여야 하고 독자생존에 대한 채권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또한 설령 부채의 대부분을 탕감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도 대우차의 독자생존을 향한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사명은 생산력 발전, 구체적으로는 대공업 및 그와 연관된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으며,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가 이룩한 이러한 역사적 성과를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체제는 많은 경우 과학기술(생산력)에 관한 자본의 기본적인 역사적 사명조차 방기하여 왔다 (그렇기에 한국경제는 '합리적인 자본주의'를 향한 노력이라는 모더니즘적 과제를 아직도 진행형으로 가지고 있다). 대우차에서 김우중의 세계전략은 기형적인 기술혁신 시스템을 남겨놓았다.
김우중은 생산규모의 확장, 생산력의 양적 (세계적) 확대에만 치우친 나머지, 그 질적 내포적 축적을 대단히 소홀하였다. 4차종의 모델을 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체의 개발에 치중하였을 뿐이며 자동차 기술의 70%를 차지하는 플랫폼(샤시와 엔진, 기어 등)의 독자 개발을 위한 노력을 의도적으로 경시하였으며, 또한 개발과정에서 필수적인 각종 시험 (주행시험장 포함)을 위한 시설과 능력의 양성에 태만하였다.

대우차가 독자생존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부채로 인한 금융비용 부담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바로 그 뛰어난 기술력, 품질력, 이익창출력으로 오뚜기처럼 부활하여 경영정상화를 이룰 잠재능력이 풍부하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그런데 대우자동차는 낮은 기술능력과 품질, 브랜드 신뢰성, 그로 인한 낮은 영업이익구조와 원가구조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다. 대우차는 99년 상반기에 이미 3500억원의 적자를 보았고 워크아웃 방침이 결정된 하반기 이후에는 적자규모가 그 배로 늘었으며, 올해 2000년 들어와서는 더욱 악화되어 상반기에만 총 1조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적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국내외에서의 대규모 할부 판매 때문이다.
99년까지도 대우차의 각종 시험설비 수준은 현대자동차의 80년대 중반 수준, 여타 개발능력은 현대의 90년대 초반 수준이다. 따라서 현대자동차에 비해 약 5-10년의 기술격차가 난다. 만약 독자회생을 추구한다면 이 격차를 향후 5-10년간에 걸쳐 최고의 기술학습 속도로 좁히지 않으면 안된다. 자동차산업과 같은 기계공업군에서 기술능력과 품질능력 발전은 압축적 성장이 곤란하다. 그 노하우의 대부분이 이론보다는 경험에 더 의존하는 까닭에, 경험과 경륜이 점진적으로 쌓이는데 필요한 시간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는 향후 5-10년의 시간 동안에는 현재의 취약한 사업구조, 이익구조가 단지 점진적으로만 개선된다는 뜻이다.
물론 기술능력도 중요하지만 조직문화 혹은 기업문화의 혁신을 통해 대우차의 흑자전환은 훨씬 앞당겨질 수도 있다. 마티스와 같은 히트 모델이 세 네 개 연달아 발표될 수 있다면 2-3년 뒤부터 흑자 전환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대우 마티스, 기아 카렌스나 카니발의 성공은 기술능력보다는 상품기획에서 마켓팅까지에 이르는 조직관리의 성공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대우차의 전면적 조직혁신이 필요했다. 김우중을 비롯한 대우차 최고경영진은 (주)대우 출신이며, 따라서 상인자본가의 관점이 대규모 산업기업을 좌우하는 질곡을 작용하였다. 대우차의 전략, 조직관행, 사업방식은 모두 기본적 틀에서 국제무역 조직에나 적당한 김우중 식의 (주)대우 문화였다. 또한 엄격한 수직적 권위주의는 자동차와 같이 2만개에 이르는 복잡계 제품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인간, 조직들간의 수평적 자율적 상호관계, 의사전달 시스템과는 전혀 맞지 않는 질곡이었다.


<수동적인 중간층, 독자생존 가능성의 포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독자생존을 향한 기대를 접게끔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대우차의 독자생존을 노력의 궁극적 주체이어야 할 사무관리직과 현장노동자들의 내부 동향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중간층 사무관리직, 연구직들이 기아차의 경험처럼 노동조합과 힘을 합쳐 회사의 독자생존을 위해 대내외적으로 힘차게 움직이기를 기대하였지다. 하지만 대우차에서 그런 조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무관리직, 연구직들의 대부분은 회사의 장래 운명에 대해 매우 수동적이었다. "누가 주인이 되건 월급만 나오면 그만"이라는 비주인적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대우차의 경영진, 중간관리직, 노동조합은 3갈래로 찢어져 서로 대립하였고, 그 누구도 회사의 독자생존이라는 엄청난 험로를 해쳐나갈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비전과 전략을 제시할 능력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회과학에서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라는 용어가 쓰인다. 기업의 경우 경로의존성은 장기간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된 조직관성, 업무관행, 사고패턴이 "관성"으로서 맹목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아차, 현대차에서와는 달리, 대우차에서는 중간관리직 연구직만이 아니라 이사, 전무, 사장조차도 총수인 김우중의 독점적인 의사결정으로 인하여 회사의 비전과 전략의 창출 업무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으며, 오랜 세월, 이런 조직관행에 순응하여 생존하고 승진하여 왔다. 따라서 이런 '관성'을 젖어 있는 최고경영진과 중간관리직에게 험난한 독자생존을 향한 전략과 비전을 제시할 투철한 의지와 날카로운 판단능력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노동조합이 해외매각 반대, 공기업화를 독자생존을 주장하긴 하였지만, 노동조합이 대내외적으로 지원세력과 협력하여 경영진을 새로이 조직하는데 스스로 앞장서고 이들과 함께 채권은행과 협상하면서 장단기 생존전략을 창출하기 위해 재무, 기술, 조직 등 모든 측면에서 함께 책임지고 나서려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주식시장형 금융 경제 개혁은 국민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물론 대우차의 독자 생존을 힘들게 하는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채권은행들의 태도이다. 여기서 문제는 과연 채권은행들이 대우차가 비로소 흑자를 낼 수 있는 빠르면 2-3년 길게는 5년의 기간을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투자가' (patient investor)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개혁 및 경제개혁의 기본 요체는 미국식 주식시장 자본주의인데, 그것의 본원적 특징은 '단기주의'(Short-Termism)이다. 일체의 경제활동이 주식가격으로 산정되어 '주식 매매 차익'을 중심으로 평가되고 따라서 주가시세의 하락을 조금도 용납지 않으려는 주주가치(Shareholder Value) 자본주의의 이념을 향해 금융개혁과 기업지배구조 개혁이 추진되는 한, 그 어떤 은행도 자사 주식가격을 떨어뜨리는 모험적인 장기투자를 감행할 수 없다.
현 정부의 금융개혁은 단기주의적 주식시장의 설립에 관한 한 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한국은 이미 인터넷을 통한 초단기 주식거래 (day trading)에서 미국을 능가하여 세계최고 (총 주식거래의 50%를 상회) 수준이다. 수백만명의 직장인들이 생산적 활동보다는 초대형 도박성 머니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초)단기주의적 증권/금융시스템 (금융자본)을 근저에서 지탱해줘야 할 기업시스템(산업자본)은 아직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외국 금융자본에 개방된 주식시장 자본주의에서는 지구적 금융자본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도로 평균 이상의 높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그런 기업들은 신속하게 퇴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들 불량기업에 잠재적 현실적으로 잠겨 있는 금융자본을 해방시켜 주식시장에 공급함으로써 총주가의 상승과 특히 우량 기업 주가의 추가적 상승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재 조건에서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수익기준에 따른 글로벌 기준치(Global Standard)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업은 삼성전자, SK텔레콤, 포항제철, 한국통신 등 불과 몇 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대 대다수 불량 대기업들은 퇴출 혹은 해외매각되어야 하는가 ? 그럴 경우 한국의 실물경제 즉 산업경제(산업자본)는 누가 담당하는가 ? 물론 벤처기업들이 창출되고 성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99년에도 전체 수출의 단 3%도 차지하지 못할 만큼 국민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여전히 산업생산(산업자본)의 대부분, 수출의 대부분은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을 담지하는 재벌계 대기업들이 이끌고 있다.
금융자본과 달리 산업자본은 일거에 해체, 재편성될 수 없다. 화폐로만 이루어진 금융자본과는 달리 그것은 돈과 인간과 조직, 기술, 문화가 결합된 강고한 구성체이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으로서의 벤처기업이 국민경제를 주도한다는 원대한 목표는 앞으로 최소한 10년 혹은 20년은 기다려야 할 장기적인 과제이다. 그 장기간의 과도기에 국민경제가 계속해서 최소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량 대기업들을 우량 대기업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장기적인" 노력을 하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 (초)단기적인 수익기준, 주가기준을 핵심가치로 하여 진행되는 현재의 은행 금융시스템 개혁을 중지하고, 주식가격 하락과 몇 년간의 손실을 감내하면서 수행되는 "장기적인 산업투자"를 금융시스템이 담당하는 새로운 대안적 방향으로 개혁 방향을 선회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
고유가로 인한 자동차 업종의 세계적 경기 후퇴조짐을 볼 때, 유일한 해외매각 희망인 지엠이 대우차를 인수할 가능성은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현 정부와 채권금융기관들은 해외매각이 불발되었을 경우 어떤 방식으로 대우차를 독자생존시킬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미소간의 냉전을 종식시키고 평화공존을 달성한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에 추진된 "500일 전투"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시장경제로의 충격적인 이행은 결국 실패하였고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서민들이 가장 경멸하는 지도자로 전락한지 오래다. 한국의 김대중은 남북한간의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IMF의 지도 하에 그가 추진한 주식시장 자본주의로의 충격요법적 이행은 삐걱거리면서 연이은 위기를 낳고 있다. 은행과 화폐소유자들에게는 돈이 넘치는데 기업들은 자금부족으로 허덕거리고 언론은 11월 위기를 전망하고 있다.
한국경제에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간의 불일치, 부조화가 존재하는 한, 빠르게 글로벌화되는 한국 금융/주식자본이 여전히 장기적으로 민족적 특질들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산업자본과 충돌하는 한, 이런 식의 경제위기는 앞으로도 장기간에 걸쳐 매년 되풀이 될 것이다.
<2001.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