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매각론을 둘러싼 금융자본 입장과 산업자본의 입장의 차이>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즉시 대우차의 해외 매각, 특히 지엠(GM)으로의 매각을 해법으로 들고 나왔다. 미국식 주식시장 자본주의의 이념이 풍미하는 이 시대에 "실패한 기업은 M&A의 대상이고, 국내에 대기업을 구매할 주체가 마땅히 없는 까닭에, 해외 매각은 당연"하다는 결론이었다. 현재 경제정책을 좌우하는 경제관료와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산업자본을 이익을 희생시키면서라도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그 요체이다. 기업과 산업, 나아가 국가경제의 사활을 좌우할 중대한 의사결정에서 이것은 오직 금융적 이해관계, 금융산업의 이해관계 하나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놓는다.
금융자본은 바로 자본중의 자본 즉 돈 그 자체의 운동이다. "돈이 돈번다" 원리가 전부이며, 인간이 차지할 자리는 여기에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경제시스템은 돈(화폐)만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돈만으로는 않된다"는 원리는 금융자본이 아닌 산업자본의 영역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산업기업의 현장에는 공장의 노동자들, 연구소의 과학기술자들, 그밖에 관리자들, 세일즈맨들 등등 피와 살을 가진 인간들이 등장한다.
화폐 그 자체가 국적을 버리고 국경을 넘어 초국적화하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원화를 달러화로, 엔화로, 마르크로 무제한으로 바꾸는 일은 각국 정부의 외환규제 장치를 법제도적으로 바꾸는 '간단한' 조치에 의해서도 실현 가능하다. 따라서 세계화(Globalization)의 주도세력은 바로 화폐자본, 금융자본이다. IMF 금융위기는 김영삼 정부가 무분별하게 실시한 외환자유화, 금융개방조치에 의해 야기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산업자본은 금융자본처럼 간단하게 국적을 버릴 수 없다. 물론 노동이 '순수한' 비숙련 노동 (주류경제학이 말하는 순수한 '생산요소'로서의 노동)으로서만 간주되는 그런 산업에서는 산업자본 역시 싼 임금과 최악의 노동조건을 찾아 세계 구석구석을 전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섬유, 가발, 신발공장들이 한국에서 방글라데쉬로 이전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산업자본이 반숙련, 숙련노동자와 나아가 연구개발 과학기술자들, 우수한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고 이들 '인간'에게 의존하게 되면 자본은 더 이상 마음대로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예컨대, 독일과 일본의 장인적 숙련공들과 기술자들에 의존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부품소재 제조업의 산업자본은 한국 혹은 미국으로 한순간에 이전될 수 없다. 이들 고급노동력의 존재는 그곳에 존재하는 전사회적 산업적 차원의 산업교육훈련 제도와 기술혁신 시스템과 뗄 수 없게끔 결부되어 있다. 이런 국가적 산업/기술 시스템 (national industrial and technological system)의 형성과 발전에는 수십 년간의 집요한 노력 혹은 백년대계가 요구된다.
김대중-이헌재가 한국에 이식하기를 꿈꾸는, 실리콘 벨리형 벤처기업이 주도하는 신경제 역시 실리콘 벨리와 결부된 미국의 과학기술 연구 및 교육시스템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엄청난 국방연구와 비실용적 기초연구라는 '민족적'(결코 '지구적'이지 않은) 자산의 백년대계적 축적 노력 없이는 곧 한계에 부딪힌다.
금융자본과는 달리 산업자본의 지구화(Globalization)는 일정한 민족적, 시간적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산업자본의 세계는 매일 수조 달러가 더 높은 이윤을 찾아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화폐의 세계, 매 시간 단타매매 (day trading)를 통해 주식시장을 전전하는 주식자본, 화폐자본의 세계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99년 8월 이후 내가 대우차를 바라본 관점은 우선은 이와 같은 산업자본의 관점에서였다. 따라서 지엠으로의 대우차 매각은 철저하게 반대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미 80년대에 있었던 '종속이론' 관련 논쟁에서 이루어진 자동차산업에 관한 실증연구들을 통해, 독자기술의 발전을 추구했던 현대차와는 달리, 대우차에서는 독자 기술능력의 발전이 지엠에 의해 좌절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또한 나는 대우차 직원들과의 면담을 통해 92년 결별 이전에 지엠이 어떤 방식으로 모델의 독자개발을 가로막았었고 또한 품질개선을 위한 제품/공정 설계변경이 어떻게 가로막혔는지에 관하여 추가적인 발견을 할 수 있었다. 김우중의 세계경영 전략은 대우차가 현재의 최악의 사태로 빠져들게 된 기본 요인이다. 하지만 20년간 계속된 지엠의 식민지 경영적 사업 행태는 바로 대우차의 현 취약성을 근저에서 만들어 냈다. 그런 원죄를 지닌 지엠이 다시 개선장군처럼 대우차에 무혈입성한다는 것은 한국자본주의의 합리적 발전을 위해서도 저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
<해외매각도, 재벌경영도 아닌 대안은 ? >
김우중의 재벌경영은 이미 파산했다. 해외 자본도 않된다. 그렇다면 누가 대우차를 맡아야 하는가 ?
이 의문에 대해 당시 대우차의 한 직원은 하나의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대우차 회생의 깃발을 들 주체는 지엠도, 삼성도 아니며 김우중의 후계자들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깃발을 들어야 한다". 나 역시 이 의견을 지지하였다. 대우차의 직원들과 노동자들이 대우차의 지배와 경영의 주체로서 나서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대우가 가진 문제는 단지 '화폐' 즉 재무금융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대우차의 '인간' 즉 조직과 기업문화 역시 큰 위기 상태에 있었다. 김우중의 1인 황제식 경영은 대우차 내부에 치명적인 조직상의 충돌, 마찰, 책임회피, 무기력, 좌절, 분노 등을 낳았다.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마티스의 4차종 동시개발과 함께 기술능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성장하는 기술능력(생산력)은 김우중 회장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조직체제와 기업문화(생산관계)과 충돌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가로막히고 있었다. 대우차 역사에서 신세대라고 할 수 있는, 4차종 동시개발을 경험한 젊은 중간급 관리자와 연구개발자, 기술자들은 김우중의 절대황제적 권위를 뒤에 업은 불합리한 경영진의 행태에 대한 좌절과 분노로 회사 전체의 조직은 이미 워크아웃 이전에도 마비증상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신세대 중간층 경영관리자, 연구개발자 등이 대우차의 기존 경영진을 대체하여 올라서고, 스스로의 비전에 맞게 새 최고경영진을 구성하여야 했다. 일본은 전쟁후 47년 재벌시스템을 해체함에 있어, 재벌과 연관된 상층 경영진 거의 모두가 퇴진하고 재벌경영과 무관한 젊은 중간층 경영자들이 최고경영진으로 일거에 상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역시, 재벌시스템을 해체함과 동시에 해외 매각에 의존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오직 이와 같은 방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사무관리직 중간층과 현장 노동자들과들이 서로 단결하여 기존의 재벌식 경영진을 몰아내야 했다.
하지만 주어진 불리한 정치사회적인 세력관계에서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 나아가 과연 사무관리직 중간층에, 현장 노동조합에, 대우차의 기업권력(지배구조)을 혁명적으로 뒤바꾸는 이런 대범한 일을 행할 의지와 능력이 있을 것인가 ?
<200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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