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음악이 주류로 자리잡은 시기는 불과 5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그 기간동안 록음악의 역사는 위대한 저항과 승리의 시간이자 동시에 패배와 굴종의 시간이기도 했다. 많은 음악평론가들이(특히 국내에서는 강헌 같은 음악평론가에 의해) 록(rock)이 마치 민중가요이자 저항가인 양 높이 추켜 세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록음악이 반항적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전성기는 사실상 60년대로 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후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 같은 인물은 일종의 오컬트(occult)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상업적이고 체제 내 반항적인 구두선(口頭禪)에 멈춰 있었다.
그러던 것이 국내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평론가들에 의해 록음악의 그런 정신이 최고의 미덕이자 시대에 반항하거나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음악은 반드시 록음악이어야 하고(이것은 사실과는 약간 다르지만), 록음악에서만 그런 반항 정신이 두드러져야 하는 것처럼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본질이지 형식이 아닌데 지금 서태지의 음악에 대한 이견들은 사실상 그런 맥락(형식주의에 치우친 것이고 과도한 애정에 의해 비뚤어져 있다.)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서태지의 속성상 난 그것이 상업적인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서태지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서태지가 혜성처럼 등장하던 92년 무렵의 시기는 동구 현실사회주의권 몰락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시기였으며 이런 시기에 비록 미국의 랩(힙합)이라는 장르이긴 했으나(나름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서태지의 등장은 그들에게는 이 땅의 날라리들이 드디어 개과천선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른바 '자연발생적 사회주의자'인 셈이다. 불과 10년도 안된 시기의 일이니 그 시기를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서태지의 팬들은 단순히 10대의 틴에이저 그룹만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지지는 오히려 이 땅의 소장파 지식인 그룹으로부터 강화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70년대의 김지하와도 닮아 있다. 70년대 우리는 최초로 우리 민족문화란 것 그것도 왕실의 것이나 귀족적인 것이 아니라 소위 민중의 문화란 것에 자긍심을 느끼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것은 일제에 의해 가리워졌던 우리의 민중 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인데, 동시에 이 시기는 급격한 도시화 확산과 함께 서구문물이 급증하던 시기로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김지하는 우리 민요적인 가락과 리듬(판소리적인 소리의 결과 메시지를 담은)을 이용한 일련의 시들을 발표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장문의 요설(饒舌)과 함께 그에 게 바쳐졌던 수많은 헌사(獻辭)의 제위에서 내려왔다. 서태지가 조선일보와 계속해서 인터뷰를 하고, 자신을 사회체제에 반항적인 가수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은 김지하의 경우와 비교하더라도 훨씬 더 온순한 것이다. 하긴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의 훼절 선언과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더라도 날라리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음,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날라리는 그냥 날라리라는 식의)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태지에 대한 평가는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으며 그런 거품을 거둬들이고 나서의 서태지는 그냥 노래 잘 하고, 유행을 잘 조합해서 곡을 만들어내는 가수일 뿐이다. 그에게 아직까지도 과도한 무게를 지워주고 싶어하는 일부 평론가들은 그만 정신차려 주길 바란다. 반항의 음악은 굳이 락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말이다.
<2001. 7. 24.>
그러던 것이 국내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평론가들에 의해 록음악의 그런 정신이 최고의 미덕이자 시대에 반항하거나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음악은 반드시 록음악이어야 하고(이것은 사실과는 약간 다르지만), 록음악에서만 그런 반항 정신이 두드러져야 하는 것처럼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본질이지 형식이 아닌데 지금 서태지의 음악에 대한 이견들은 사실상 그런 맥락(형식주의에 치우친 것이고 과도한 애정에 의해 비뚤어져 있다.)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서태지의 속성상 난 그것이 상업적인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서태지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서태지가 혜성처럼 등장하던 92년 무렵의 시기는 동구 현실사회주의권 몰락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시기였으며 이런 시기에 비록 미국의 랩(힙합)이라는 장르이긴 했으나(나름의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서태지의 등장은 그들에게는 이 땅의 날라리들이 드디어 개과천선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른바 '자연발생적 사회주의자'인 셈이다. 불과 10년도 안된 시기의 일이니 그 시기를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서태지의 팬들은 단순히 10대의 틴에이저 그룹만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지지는 오히려 이 땅의 소장파 지식인 그룹으로부터 강화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70년대의 김지하와도 닮아 있다. 70년대 우리는 최초로 우리 민족문화란 것 그것도 왕실의 것이나 귀족적인 것이 아니라 소위 민중의 문화란 것에 자긍심을 느끼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것은 일제에 의해 가리워졌던 우리의 민중 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인데, 동시에 이 시기는 급격한 도시화 확산과 함께 서구문물이 급증하던 시기로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김지하는 우리 민요적인 가락과 리듬(판소리적인 소리의 결과 메시지를 담은)을 이용한 일련의 시들을 발표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장문의 요설(饒舌)과 함께 그에 게 바쳐졌던 수많은 헌사(獻辭)의 제위에서 내려왔다. 서태지가 조선일보와 계속해서 인터뷰를 하고, 자신을 사회체제에 반항적인 가수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은 김지하의 경우와 비교하더라도 훨씬 더 온순한 것이다. 하긴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의 훼절 선언과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더라도 날라리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음, 그것이 우리나라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날라리는 그냥 날라리라는 식의)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태지에 대한 평가는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으며 그런 거품을 거둬들이고 나서의 서태지는 그냥 노래 잘 하고, 유행을 잘 조합해서 곡을 만들어내는 가수일 뿐이다. 그에게 아직까지도 과도한 무게를 지워주고 싶어하는 일부 평론가들은 그만 정신차려 주길 바란다. 반항의 음악은 굳이 락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말이다.
<200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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