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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Tempus Edax Rerum

단상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김창남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공부란 콩나물을 기르는 일과 같아서 구멍난 시루에 매일같이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셨었지. 공부란 '스며듬'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1.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를 사람들은 지음이란 두 글자로 기억한다. 백아가 거문고를 들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을 타면 종자기는 옆에서, "참으로 근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 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기가 막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는 것 같구나"라며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세상에 다시는 자기 거문고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
거북이와 토끼의 달리기 우화(寓話)를 놓고 거북이가 어떻게 토끼를 이길 수 있느냐고 따지는 사람은 제 얕은 앎에 빠져 정작 핵심이 되는 우화의 중요한 교훈을 얻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화’라는 담화체제(談話體制)가 가진 고유한 구조를 먼저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맥이 빠질 뿐만 아니라 상대의 소갈머리에 갑갑해진다. 하지만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말도 있듯 잘못된 해석, 오독(誤讀)이 없었다면 문학과 예술은 빛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3.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에서 일품의 거문고 솜씨를 지닌 백아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동양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자기완성의 길만을 외롭게 고집해 나아가는 가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관이 아니었을까. 혼자 쓰고, 혼자 읽는 글이 아닌 다음에야 오독의 위험은 피할 수 없는 것이겠다.

클래식 음악에서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파 등 고전 시대 이전의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리켜 일명 원전연주, 정격음악(authentic music)이라 부른다. 현대적인 피아노가 아닌 하프시코드, 바이올린이 아닌 비올로 연주하여 옛 소리를 재현해내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재현일까? 우리는 예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재간이 없다. 작곡가 자신도 자신의 음악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으며, 화가의 작품도 결국 빛에 의해 반사되는 색감에 따라 매순간 다른 색으로 빛나게 되며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나 감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타인의 글 읽기에 대해 그것이 설령 내 글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의미를 명확히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읽었다면 그것이 그에겐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4.
백아의 연주를 홀로 알아들었기에 종자기를 지음이라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백아의 연주는 듣는 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연주였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예술에서 창작을 일 삼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타인의 시선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이 문제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대중에게 인정받기 위한 예술의 추구란 한 마리 여왕벌을 향해 구애의 몸짓으로 날아오르는 무수한 수벌들의 허무한 비행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여왕벌의 사랑을 얻는 것은 가장 높이 날아오른 단 한 마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떨어져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예술의 세계에서 명성을 얻는다는 건 정자(精子)가 사람 되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요. 더군다나 그 명성이 당대가 아닌 백 년 뒤나 오백년쯤 뒤에도 여전히 그 이름을 남긴다는 건). 그렇다고 이 수벌들의 비행이 허무할지는 몰라도 꿀벌사회의 체제를 생각했을 때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게다.

5.
가끔 세상살이가 무척 허무해지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곤충의 세계를 상상해보곤 한다. 일개미들의 행진, 수벌의 비행은 허무하지만 무의미하진 않다고... 콩나물 시루가 밑 빠진 독이라 그 위로 쏟아 붓는 물줄기들은 죄다 밑구멍으로 빠져나가지만 습기를 머금은 콩들은 어느새 자라나서 시루를 덮어 둔 묵직한 백과사전을 밀어 올리듯이... 이 허무를 반복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 누구라도 콩나물쯤은 키울 수 있다고....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