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의 편지 - 에즈라 잭 키츠 | 이진수 옮김 | 비룡소(1996)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주인공들이 한 차례 반짝 등장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앞서 "피터의 의자"편에서 이미 한 차례 이야기했다. 이번에 이야기할 "피터의 편지"도 역시 전작의 주인공인 피터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피터의 의자" 속에 등장한 피터에게 아기 시절의 피터가 액자 속 사진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피터의 편지"에 등장하는 피터는 같은 주인공이지만 이전의 주인공과는 다른(좀더 성장한) 인물이다. 피터는 생일을 맞이해 한 친구를 부르고 싶어한다. 그 친구는 "에이미"란 여자 아이다.

 

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내 추억 하나가 설핏 떠올라 혼자 흐뭇하게 잠시 웃었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던 날, 가재수건을 잘 접어 안전핀으로 가슴에 고정시키고 앞으로 나란히를 했다. 도토리 키재기겠지만 교실 문 앞에 남녀 학생들이 두 줄로 나란히 늘어서 키높이대로 짝궁을 지었다. 그런데 내 짝궁이 말이다. 세상에 아주 예쁜 거다. 게다가 깔끔한 차림하며 새초롬하니 앉아있는 모습을 곁눈으로 훔쳐보니 작은 가슴은 왜 그리 콩닥콩닥 뛰던지... 하지만 어린 마음이라 그랬을까. 그 짝궁에게 특별히 말을 걸어본 기억이 내겐 없다. 다만 초등학교 1학년 난생 처음 가는 봄소풍 날 일어난 일만 기억에 남았다.

 

요새 같으면 아이들이 유치원 시절부터 서로 한데 어울려 지내지만, 나는 유치원에 다니질 않고 바로 초등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일까 여자 아이랑 한 곳에서 지내게 된 건 초등학교 때가 첫 경험이었다.  소풍을 가는데 지금은 한 반에 40명 내외지만 그때만 해도 인구 비례해서 초등학교 수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 반에 무려 60-70명의 아이들이 버글버글하던 시절이 아닌가. 그런 학교 환경에 소풍이라는 건 어마어마한 대군이 움직이는 행사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담임 선생님의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을 거다. 우리는 짝궁과 손을 잡고 일렬 종대로 선생님 뒤를 따라가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남들은 다 옆 짝궁이란 덥석덥석 손도 잘 잡고 가는데, 나는 짝궁 손을 차마 못 잡겠는 거다. 결국 선생님이 이 모습을 보고 달려와서 강제로 옆 짝궁의 손을 잡게 했지만 나는 짝궁의 맨손을 잡지 못하고, 그 아이의 옷자락 하나를 대신 쥐는 것으로 해결을 보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힐 일이다. 내가 이 기억을 좀더 오래 지니게 된 까닭은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엔 고만 전학을 가게 되었기 때문일 거다. 만약 내가 1학년을 거기서 마치고, 졸업할 때까지 다녔다면 1학년 때 옆짝궁이 자라는 모습을 계속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나와 그 친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영 아쉬움만 남는다. 그런데 왜 아쉬움이 남는 거지... 나 원참... 흐흐. 에즈라 잭 키츠는 자신의 동화에서 그려지는 어린 주인공들의 모습을 자기 자신의 추억 속에서 얻는 영감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전에는 어린이였다.우리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솔직하게 말을 건다. 그리고 최고의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대한다.(엘렌 E. M. 로버츠, 그림책 쓰는 법, 문학동네, 164쪽)"

 

앞서 에즈라 잭 키츠가 폴란드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란 이야기는 한 바 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야고보 에즈라 카츠(Jacob Ezra Katz)"란 유태계 이름과 성씨였다. 그가 이민자의 후손으로 자신의 성씨 때문에 소수자로 어떤  인종차별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론 알 수 없으나 1950년대 미국의 반유대 분위기 때문에 스스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가 어째서 자신의 첫 작품에서 푸에르토리코 소년 "화니토(Juanito)"를 등장시켰는지(유색 인종을 택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동화 속에 유색인종이 등장한 것은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 책 "피터의 편지"에 등장하는 흑인 소년 피터는 그가 1940년 5월 13일자  "라이프Life" 잡지에 소개된 조지아주의 한 흑인 소년의 기사에 감흥을 얻어 구상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사진이 너무 작아 글자를 판독할 수는 없지만 "Blood Test"란 글자로 보아 남부 지역의 흑인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누구 좀더 자세히 아시는 분이 알려주시면 좋겠다-음, 니그로 보이란 말이 좀 걸리지만 기사 내용 자체는 그보단 아이가 주사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웃고 있는 것에 촛점을 맞춘듯). 에즈라 잭 키츠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는데, 그가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흑인 소년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차별받았던 경험이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 인생을 바꿀만한 경험이 시작되었다 - 흑인아이가 영웅(주인공)인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그 어느 책에서도 흑인아이가 등장하지 않았었다  배경속의 아주 작은 모습으로밖에. 그 아이가 내 책에 있는 이유는 그 아이가 지금까지 마땅히 그곳에 있어야했기 때문이다. 몇년전에 한 흑인꼬마아이의 사진을 잡지에서 오려둔적이 있다. 내가 동화를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난 그 사진을 내 책상머리에 붙여두었었는데 그 사진을 바라보는 일을 참 좋아했다. 바로 이 아이가 내 책속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피터가 처음 등장한 "눈오는 날(The Snowy Day, 1962. 미국도서관협회에서 수여하는 칼데콧상을 수상했다)"로부터 시작해 "Whistle for Willie(1964), Peter's Chair(1967), A Letter to Amy(1968), Goggles!(1969), Hi Cat!(1970), Pet Show(1972)"에 이르는 동안 피터는 끊임없이 성장해간다. "애완동물 쇼"에 이르러 피터는 어린이에서 청소년의 세계에 진입한다. "피터의 편지"의 원제는 "A Letter to Amy"로 "피터의 의자"가 쓰여진 이듬해(1968) 발표되었다.

 

피터는 자신의 생일에 초대하고 싶은 여자 친구 에이미에게 보낼 초대장을 쓰느라 궁리 중이다. 이건 피터가 태어나 처음 쓰는 편지이자 처음 생긴 여자 친구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지-만-요, 이번엔 좀 특별하거든요."라고 말할 만큼 피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처음하는 경험이므로 피터는 최선을 다하지만 역시 심장이 마구 뛰는지 실수를 연발한다. 편지를 여러번 접어 봉투 안에 집어 넣고, 가려는데 급하게 서둔 나머지 시간을 적어넣지 않거나, 우표를 붙이지 않는 등 실수를 연발한다. 애완견 윌리에겐 비가 오니 집에 남으라고 말하고 뛰어나간다. 아마 이번 일만큼은 혼자서 처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노란 우비를 입고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애견 윌리가 누구인가? 전편격인 "피터의 의자"에서 함께 가출을 감행하기도 한 주인공이기도 하지 않은가.


 

우체통으로 가면서 윌리는 에이미 집 앞 창가를 지난다. 그런데 M.K와 S.J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하트와 화살표로 사랑에 골인했음을 알리는 아이들의 낙서가 그려진 담벼락 사이로 애견 윌리가 고개를 빼곰히 내밀고 있다. 얄궂게도 화살표는 정확히 피터의 시선과 윌리의 시선을 교차하게 만든다. 서로 뻘쭘히 바라보는 애견 윌리와 피터의 시선을 에즈라 잭 키츠는 독자들에게 "놓치지 마시라. 개봉 박두" 하고 외치는 듯 보인다. 사실 윌리가 이렇게 허둥지둥하고 있는 건 '생일 파티에 여자애가 오면, 남자애들이 보고 뭐라고 할까?' 하는 염려때문이었다. 그렇다. 남자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놀림은 바로 "알나리 깔나리, 누구랑 누구는 그렇고 그런 사이, 알나리 깔나리"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천둥이 치고 피터는 편지를 그 서슬에 그만 놓치고 만다. 바람에 불려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편지를 잡으려고 뛰다가 피터는 누군가와 쿵하고 부딪치고 만다.





사실은 에이미가 바람에 날리는 편지를 잡아주려 달려가는 걸 피터는 "에이미가 편지를 보면 안돼. 그러면 덜 놀랄 거야!" 하며 서두르다 고만 부딪치고 만 것이다. 피터 이 친구, 깜짝 쇼의 묘미도 벌써 터득하고 있는 대단한 녀석이다. 하지만 에이미는 그것도 모르고 울면서 달려간다. 과연 이 두 친구 에이미와 피터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는 지난 1983년 5월 6일 심장마비로 숨질 때까지 모두 여든 다섯 편의 작품을 남겼고, 어린이 그림 동화 부문의 여러 상을 받았다. 그의 사후엔 에즈라 잭 키츠의 고향인 브룩클린의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에 그를 기리는 뜻음 담아 피터와 윌리의 청동상에 세워졌다.

 

그의 동화 속 캐릭터들과 이야기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추억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한직한 사람과 이야기를 정교하게 다듬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에즈라 잭 키츠의 동화를 읽노라면 신영복 선생의 "화이트와 블랙은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선(善)과 악(惡), 희망과 절망의 상징이었습니다" 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검은 피부의 소년 피터가 등장하는 에즈라 잭 키츠의 동화는 지금까지 접해온 동화 속 캐릭터들의 뽀얗고 발그레한 뺨을 물들이고 있는 그야말로 동화 속에 등장할 법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이질감 같은 걸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영어사전에서 'black'이라는 단어를 찾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 말엔 '검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음산한, 침울한, 화가 난, 험악한, 심사가 고약한, 사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등의 뜻이 있음을 말이다. 반대로 'white'의 의미는 '희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결백한, 순진한, 오점이 없는, 악의가 없는, 정직한, 공정한, 훌륭한' 등의 뜻이 된다는 것도 말이다.

 

예전에 우리가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여겼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백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볼 시기가 되었다. 우리 안에 수많은 이방인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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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의 의자 - 에즈라 잭 키츠 | 이진영 옮김 | 시공주니어(1996)




에즈라 잭 키츠가 뉴욕 브룩클린의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앞서 "내친구 루이"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폴란드 그리고 유대인, 이민자... 라는 이 세 단어는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폴란드계 유대인하면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인물은 "로자 룩셈부르크"이다.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엔 이런 대목이 있다.

 

로자로 하여금 삶을 지탱하도록 해준 것, 시련을 견뎌나가게 해주고, 정면으로 맞서며, 추락할 때마다 다시 튀어오르게 해준 것, 불안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게 해준 것은 유머였다. 아마 그건 자신도 모르게 폴란드계 유대인이라는 출신이 부여한 타고난 유머감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파괴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푸른숲, 382쪽>

 

1492년 스페인은 레콩키스타(정치적 통일)를 완수한 뒤, 스페인 지역 내의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를 실시했고, 이때 스페인의 유태인들가운데 대략 25만 명이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했다. 19세기 초 유럽 전역에는 약 330만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대박해인 "포그롬(pogrom)"이 행해졌는데, 이 무렵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은 폴란드였다. 러시아에서 포그롬이 행해질 무렵 중동부 유럽엔 대략 65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홀로코스트가 일어나던 1939년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은 85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폴란드는 1795년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국에 의해 분할되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한 '바르샤바 공국시대(1807-1815)'를 제외하고 1795년부터 1918년까지 3국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폴란드의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 에즈라 잭 키츠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막스 갈로의 표현을 빌어 한 단어를 더 추가해야겠다.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파괴되지 않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는 공동체" 의식을 지닌 작가. 에즈라 잭 키츠라고 말이다.

 

그의 작품에는 여러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기 보다 서민적인 일상의 주인공들이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한 번 등장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 속 어딘가에서는 주인공 혹은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에즈라 잭 키츠가 어떤 사람도 주변부화되는 것, 소외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에즈라 잭 키츠의 "피터의 의자"에서 주인공 피터는 평범한 흑인 서민 가정의 어린이다. 그는 "내가 어린이책을 만드는 목적은 실재에서 환상까지 나의 모든 경험을 아이들과 나누기 위해서이다. 나는 그 아이가 누구든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느끼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말한다. 피터에게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어린 피터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터에게 동생이 생겼다. 피터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야기의 첫 장면은 어린 피터가 혼자, 아니 혼자는 아니다. 화면 우측 하단에 쭈그려 앉아서 피터가 놀고 있는 장면을 반쯤 감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강아지(아마도 닥스훈트가 아닐까 싶은데) 윌리가 있다. 피터는 나무토막과 기타등등의 잡동사니를 이용해 이제 막 빌딩 한 채를 완성하려는 찰나다. 그때 윌리가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바람에 피터가 공들여 쌓은 빌딩이 무너지고 말았다. 함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기가 깰지 모르니 조용히 놀라는 말이다. 다음 장면에서 피터와 윌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 이 장면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에즈라 잭 키츠 특유의 콜라쥬 기법이 응용된 화면에서 마치 동화 바닥을 벽삼고, 문삼아 만화처럼 피터와 윌리가 목만 내밀고 있다.(동생 수지의 방 안을 들여다 본다. 수지? 수지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맞았다. 에즈라 잭 키츠의 "내친구 루이"에서 로베르토와 함께 어린 루이에게 인형극을 보여주던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 또한 수지이다. 이 책 "피터의 의자"가 1967년작이고, 루이가 1975년작이니 그 기간 동안 어린 수지가 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피터는 자신의 물건을 동생을 위해 분홍색으로 스스로 칠하면서 박탈과 소외의 슬픔을 벗어나 나눔의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깨달아 간다.

 

어찌되었든 에즈라 잭 키츠는 그림동화작가로서 일러스트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역시 대단하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이는데, 첫번째 에피소드와 연계된 바로 다음 대목에서 이야기 전체의 갈등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잘 암시해주고 있다. 피터가 사용하던 요람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는 피터의 여동생 수지였던 거다. 작가는 어린 피터의 생각 "저건 내 요람인데, 분홍색으로 칠해버렸잖아."를 통해 피터의 박탈감과 그것이 현실 상황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피터의 의자, 즉 파란색 의자가 어떻게 피터의 손에 의해 분홍색으로 덧칠되는가 하는 과정을 통해 잘 녹아든다. 피터는 자신의 요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술 더 떠 피터가 앉았던 식탁 의자까지 분홍색으로 덧칠하려고 한다. 그것도 피터의 손까지 빌어서 말이다. 게다가 피터의 침대 마저 분홍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어린 피터에겐 이 과정이 마치 분홍색의 침공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어린이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느끼게 되는 박탈감과 이를 치유하고, 스스로 성장한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묘사하는 과정을 에즈라 잭 키츠는 색의 변화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제 피터에게 남은 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 하나뿐이다. 피터는 의자와 강아지 윌리를 데리고 가출을 시도한다. 그동안 피터에게 더할나위없이 소중하고 아늑했던 공간인 가정에서 분홍색(여동생 수지)은 점점 피터의 자리를 점령해들어오고, 피터는 하나 남은 자기 의자를 가지고 탈출하는 것이다. 자기 의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피터의 모습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된다. 마치 5.16군사쿠데타 이후 시청 앞 광장에 서 있는 박정희 처럼 양 손을 허리께에 짚고는 의자를 내려다 보고 있는 장면이 비장하기 이를 데 없어 웃음이 절로 나는 것이다. 게다가 피터가 집을 나올 때 함께 가지고 나온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웃음은 더욱 커진다. 사진 속의 아기 피터조차 작은 의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에즈라 잭 키츠는 사진 속의 피터를 그려내곤 혼자 씽긋 웃지 않았을까.

 

분홍색의 침공으로부터 탈출한 피터는 많은 일을 했으므로 이제 피터는 조금 피곤하다. 피터의 옷과 신발도 모두 의자와 같은 청색 계열로 묘사되고 있는데 의자에 앉으려던 피터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에즈라 잭 키츠는 이 장면을 마치 영화 속의 줌인처럼 화면 속의 인물들을 좀더 크게 그려내고 있는데, 사진 속의 아기 피터와 피터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흡사하게 묘사되고 있음에 이 작가의 섬세함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작가는 피터가 벌이는 잠시의 일탈, 아니 일탈이라기 보다는 동생이 생긴 어린이의 반항을 따스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엄마가 창가로 와서 피터를 불렀어.
"피터야,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래?
점심에 아주 맛있는 걸 해 먹을 건데."
피터와 윌리는 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 했어.
피터에게는 따로 생각이 있었거든. <본문 중에서>

 

엄마의 부름에 딴청 부리는 피터, 이때는 사진 액자에 담긴 아기 피터도 딴청을 부리는 듯 보이고, 피터가 들고 나온 악어 인형도, 개구진 애완견 윌리도 피터와 반대 방향을 쳐다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누구라도 어린 시절 자신의 잘못을 깨닫긴 하지만 겸연쩍은 탓에 이를 인정해보지 못한 경험이 있을 거다. 그 순간의 한 장면을 카메라로 찰칵 담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피터는 엄마 몰래 커튼 뒤에 숨어서 엄마가 자기를 찾아내도록 한다. 물론 커튼 아래로 피터의 파란 신발이 보인다. 엄마가 커튼을 훽 젖히자, 피터는 옆에 숨어 있다가 폴짝 뛰어나와 소리친다. "나 여기 있어요."

 

엄마가 피터를 못 찾은 건지, 일부러 못 찾은 척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피터의 엄마는 피터 자신이 스스로 성장했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피터의 명분을 세워주었고, 피터 역시 이런 사려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답게 스스로 자신의 의자를 분홍색으로 칠해 동생 수지에게 선물할 계획을 말한다. 박탈이 증여로 바뀌는 순간이다. 에즈라 잭 키츠는 어린 피터의 모습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작은 교훈을 가르쳐주는 지도 모르겠다. 우린 누구나 알게 모르게 남의 몫을 조금씩 얻어쓰고, 나눠쓴 덕으로 오늘까지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분홍색(동생)을 침탈로 여겼다면 이젠 함께 하는 연대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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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루이』 - 에즈라 잭 키츠 | 정성원 옮김 | 비룡소(2001)


김종현 감독의 "슈퍼스타 감사용"을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정서마저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 가까운 역사 속의 인물, 과연 패전처리 전문투수 "감사용"이란 실제 인물을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무명 투수 감사용에게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과연 나는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닐까? 나란 한 개인은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위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겠지만, 우린 역사 속에서 민중 혹은 대중의 존재로서 분명히 각인되는 존재들이란 점에서 역시 역사적인 존재들이다. 그런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내 심금을 울리던 한 장면은 이범수가 연기한 감사용의 어머니(김수미)의 가게에서 일어난 한 대목이었다. 감사용의 어머니는 사용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걸 반대해왔고, 사용이 야구를 하든 말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어머니 앞에서 사용은 자신이 패전처리 전문 투수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

 

패전 처리를 마치고 어깨가 축 처진 채 어머니가 일하는 시장 가게에 돌아온 사용 앞에서 사용의 어머니가 기침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없는 꼴찌팀의 패전 처리 전문 투수 사용은 갑자기 짜증이 벌컥 나면서 어머니에게 그러게 병원 좀 가보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짜증을 부린다. 손님이 와서 물건을 파는 동안, 어머니는 사용에게 서랍의 약 좀 꺼내달라고 말한다. 공연히 서랍을 벌컥 여는 사용의 눈엔 그간 자기 팀이 가졌던 인천 홈 경기 입장권이 수북하게 쌓인 것을 발견한다. 사용의 어머니는 그동안 말없이 사용이 몸담고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 경기를 모두 보아온 것이다. 사용은 기쁨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와 고개를 떨군다.

 

단지 왼손 투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원년 멤버가 될 수 있었던 프로야구 선수 감사용에게 선발 라인업에 끼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그는 이룰 수 없는 이상과 열망을 가졌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아이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는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도 우리들에겐 누구에게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장애)를 하나둘씩은 가지고 있다. 상처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까. "슈퍼스타 감사용"을 보며 떠오른 그림동화작가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즈라 잭 키츠(Ezra Jack Keats, 1916 - 1983)"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부모 마음이야 모두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나오라고 잔소리 하는 걸 나는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어디 그뿐이랴만은 그것이 애정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잘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나는 사랑이 뭔지 몰랐으니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부와 대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재벌이 되거나 역사에 기리기리 기억될 위인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건 좋은 대학 나와 판검사, 의사, 변호사, 공인회계사 같은 것이 되길 바란다. 꼭 이런 직업이 아니더라도 어른들이 요구하는 건 단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남들처럼(?) 평범한 생활인이 되는 것 뿐이다. 알고보면 우리나라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품은 소망은 그네들의 잔소리만큼이나 자잘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에즈라 잭 키츠의 아버지도 그가 세계적으로 이름난 동화작가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에즈라 잭 키츠는 작품 속의 주인공으로 유색인종을 등장시킨 최초의 그림동화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약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전까지 나는 그저 유명해지기 위한 시도의 일부로 도입된 일종의 기획(컨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즈라 잭 키츠의 본명은 "야곱 에즈라 카츠(Jacob Ezra Katz)"였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계 유태인 이민으로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급사로 일했다고 한다. 뉴욕 브룩클린의 척박한 살림살이 속에서 화가의 꿈을 키웠던 아들 에즈라, 비록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이긴 했으나, 고등학교 때는 전국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으나 그에게 화가의 꿈을 계속 키워나가라고 격려해줄 수는 없었으리라. 에즈라 잭 키츠가 한창 화가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할 무렵, 그의 아버지가 숨지고 만다. 에즈라는 아버지의 유품인 지갑 속에서 색이 누렇게 바랜 꼬깃꼬깃하게 접힌 신문기사 스크랩 한 장을 발견한다. 아버지의 지갑 속에 든 신문기사는 아들의 미술대회 수상 기사였다.

 

에즈라 잭 키츠의 "내 친구 루이"는 가난하고 허름한 빈민가의 소년 루이가 주인공이다. 에즈라 잭 키츠가 묘사하고 있는 소년 루이의 피부는 역시 백인의 피부색은 아니었다. 어린이 그림 동화에서 색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들은 대체로 어두운 색조, 비교적 짙은 음영의 회색빛과 뉴욕의 오래된 벽돌담을 느낄 법한 갈색이 주조를 이룬다. 하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어린이들만큼은 밝은 색을 사용한다. 이 책의 첫 장을 보면 수지와 로베르토의 인형극을 보기 위해 찾아온 어린이들을 수지와 로베르토의 시각에서 묘사하는 구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지와 로베르토와 인형극을 준비하며 막 사이로 그들 인형극의 두 주인공 생쥐 인형과 구씨(인형)와 함께 인형극의 시작을 기다리며 자리에 앉아있는 루이와 다른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생쥐 인형을 움직이는 로베르토는 올리브그린 빛깔의 모자와 상의를 입고 있고, 구씨 인형을 움직일 수지는 연보랏빛 오버올 치마에 밝은 색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맞은 편 의자엔 어린 루이가 앉아 있고, 그 옆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노란 모자를 쓴 소녀가 다른 어린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밝은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 루이의 두 손은 가지런하게 모아져 있지만 어쩐지 그의 모습은 외로와 보인다.

 



펼친 페이지로 구성된 단 한 장의 그림이지만, 이미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그림 동화일수록 허투루 그려지는 그림은 한 장도 없다. 책의 '댓수'를 맞추기 위한 편의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대개의 그림동화책은 16쪽에서 많아 봐야 24쪽 이내에서 만들어지는데, 그림 동화책이란 것이 보기엔 쉬워보여도 이 작은 분량으로 남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보통의 노력과 재능으론 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동화작가에겐 산문적 재능보다는 시적 재능이 좀더 필요하다. 에즈라 잭 키츠의 그림 동화책은 그림만으로 구성되진 않지만 묘사는 그림을 통해, 스토리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에 꼭 필요한 만큼의 지문과 대사가 삽입된다. 
 

 


작품의 내용은 수지와 로베르토가 진행하는 인형극에서 구씨 인형을 너무나 좋아하게 된 어린 루이의 열망을 다루고 있다. 루이는 인형극이 진행되기 어려울 만큼 구씨 인형을 열렬히 좋아한다. 그런 루이에게 수지와 로베르토는 조용히 하라고 야단을 치거나 공연 진행에 방해되니까 나가라고 나무라지 않는다. 수지와 로베르토는 인형의 입을 빌어 루이와 대화를 나누고, 인형극을 진행한다. 인형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루이는 여전히 구씨에 대해 눈을 떼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루이의 어깨는 축처져있고, 그가 걸어가는 뒤로는 높다란 담벼락이 마치 이룰 수 없는 열망의 상징처럼 솟아 있다. 원래 에즈라 잭 키츠는 콜라쥬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에선 유일하게 이 장면의 담벼락에서만 사용된다. 전체에서 유독 이 장면이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처리한데는 그만의 암시가 숨겨져 있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루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다음 페이지에서 에즈라 잭 키츠는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아이스크림과 그 위에 구씨와 함께 올라탄 루이를 묘사한다. 처음에 나는 갑자기 등장한 아이스크림에 놀랐는데, 시 작법상에서도 그렇지만 그림 동화 안에서 등장하는 상징이나 비유는 작품 전체의 구조 안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때 더 큰 파급력을 지닌다. 맨 처음 장면에서 함께 인형극을 보며 옆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던 노란 모자의 소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아이스크림이란 사실을 안 순간, 나는 에즈라 잭 키츠의 그 솜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이스크림의 색깔과 녹아내린 모양까지 똑같았다. 이렇듯 그림 속에 녹아난 소년의 외로움에 대해 이보다 적절한 묘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에즈라 잭 키츠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감사용이 박철순과 벌인 대결은 너무나 가슴 벅찬 것이었으나 결국 감사용은 박철순에게 패하고 만다. 다음 장면에서 루이는 끝없는 추락을 경험한다. 펼친 페이지의 왼쪽 면에 지문이 있고, 오른쪽 페이지의 맨 하단 부위에 추락하는 루이를 묘사하고 있다. 그림책의 판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끝없는 추락인 셈이다. 잠시 몽상의 대가로 루이는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다. 루이는 자기도 모르게 맨땅에 엎드린 채 팔 다리를 흔들며 허공을 허우적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런 루이를 놀린다. 몽상이 아름다운 만큼 그 뒤에 오는 추락과 현실은 더욱 끔찍한 것이다. 하지만 에즈라 잭 키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구원이랄까, 소원 성취는 그만큼 아름답다.

 

엄마가 물었지. "루이야, 뭐 하고 있니?"
루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 꿈 때문에 아직도 슬펐거든.
엄마는 다가와서 말했어. "루이야, 누가 너한테 쪽지를 써서 문틈으로 넣어 두었구나."
쪽지엔 이렇게 적여 있었지.

"안녕! 안녕! 안녕!
밖으로 나가서 녹색줄을 따라가 봐."

루이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봤어.
<본문 중에서>

 

마지막 엔딩장면을 이야기하는 것은 끔찍한 스포일러가 될 듯하다. 미리 조금만 이야기해둔다면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의 해피 엔딩일 수도 있고, "에게, 고작 이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나에겐 감사용이 박철순을 이겼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흐뭇해지진 않았을 거란 말쯤은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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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쓰는 법 - 엘렌 E. M. 로버츠 (지은이) | 김정 (옮긴이) | 문학동네어린이(2002)


엘렌 E.M.로버츠의 "그림책 쓰는 법"을 읽고 떠오른 단상 몇 가지... 우선 이 책에 실린 엘렌 E.M로버츠의 프로필 사진은 너무 젊을 때 것이 아닌가 하는 거다. 이 책이 쓰인 것이 1981년이고 그 이전부터 20여년간 그림책 전문 편집자로 활동했다니 지금 연세가 어느 정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이 말은 웃자고 한 이야기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이 책은 창작에 관한 책이다. 일종의 창작법 책인데 이 방면에 관한 한 나도 꽤 여러 종의 책을 읽었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부터 시작해서 오규원 선생의 "현대시작법", 전상국 선생의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 송하춘 선생의 "발견으로서의 소설기법", 이호철 선생의 "소설창작강의", 린다 시거의 "시나리오 거듭나기",  사이드 필드의 "시나리오란 무엇인가" 등등이다. 지금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언급 못하는 것도 수 종 있으니 이만하면 대문호까지는 못되더라도 뭐 하나쯤은 건져볼 만하지 않겠나?

 

본래 무엇무엇에 대한 "작법"이란 시중의 처세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성격을 지닌다. "카네기 처세술"부터 시작해서 "전두환 리더십 노태우 처세술"까지 세상의 온갖 처세술을 읽는다고 해서 세계 최고의 처세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처세술을 읽는 것과 처세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인데, 처세술을 읽었다고 그대로 처세할 수 없는 것이 첫째요, 처세술 책이란 것이 대개는 바른 말만 하기 때문에 책장을 덮으면 고스란히 날아가버리는 게 둘째다. 이를 창작법 책에 대입해보면 100이면 8에 90은 흡사하다. 자, 과연 그런가?

 

읽다보면 뜻밖에 처세술이란 게 무척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혈액형별 성격 분류를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어딜가나 혈액형을 물어보곤 짐짓 무언가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이곤 하는 것처럼 처세술 도서를 읽고 그대로 따라는 못해도, 이런 자리에선 어떻게 처신할까 정도는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처세술의 재미와 핵심은 누군가의 행동과 말에 대해 의도가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분석하는 것이다. 처세술 책을 뭐 꼭 처세에 관심있는 이들만 있으란 법이 없듯이 창작법 책들도 창작하는 이들만 읽으란 법은 없다.

 

그 방면에 대해 좀더 잘 알고, 이해하면 읽기에도 무척 도움이 된다. 흔히 예술을 그 행위 주체로 구분할 때, 창작자와 감상자, 비평가의 구분으로 보는데, 비평가를 뭐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냥 프로야구 해설자 하일성 씨처럼 생각해보자. 하일성의 야구해설이 재미있는 건 누구나 아는 바다. 그런데 그 양반의 야구 해설이 재미있는 이유가 뭘까? 우선 그 양반의 구수한 입담, 맥을 짚어주는 선견지명일 것이다. 그 바탕엔 그가 창작자라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의 심리 혹은 경기의 구조를 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법책을 독자가 읽어두면 재미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림책 작가의 의중을 꿰고, 그림책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미있고, 모범적인 책이다. 아동출판 시장은 점점 더 커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비평은 시장 규모를 따라가지 못한다. 아동출판물 시장이 그토록 많은 종수를 차지하고 있는 배경엔 출산율이 저하되면서 하나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좀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비평은 드물고, 장사는 되니까 좀 심하게 말하면 시장이란 측면에선 눈먼 돈이 돌아다니까 출판물 가운데서도 그만큼 옥석이 뒤섞이게 마련이다. 과거의 가족단위에서라면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감당해주었어야 할 몫들 - 육아나 아이들에게 구수한 옛 이야기 - 이 초보 엄마, 아빠들에게 떨어진다. 게다가 7차 교육과정 개편 이후엔 아이들에게 떨어지는 숙제는 사실상 엄마들 숙제나 진배없다. 이제 교육의 최전선은 가정이고, 초보 엄마들이 최일선의 교사들이다.

 

그러다보니 엄마들이 책을 골라주고, 아이에게 읽어주고, 설명해주어야 한다. 어허, 그것 참 엄마들이 가정교사이고, 보육원 원장이고, 그림책 평론가에, 이야깃꾼이 되어야 하니 그 하중이 얼마나 크겠나.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서평을 너무 약장사처럼 쓰고 있나.

 

"에헴, 그렇다면... 뭐 본격적인 약장사 버전으루다가... 이야기해보면, 이 책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다년간 그림책 분야에 종사해오신 엘렌 선생께서 심혈을 기울여 집필하신 책으로, 그림책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를 창작자에 대한 가장 친숙한 조언자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의 특장점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책에서 예제로 언급하고 있는 그림책들은 우리 시대의 필독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그림책들로써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책 리스트가 될 수 있으며, 아이들의 독서지도의 지침서로 이용해도 좋을 만큼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과히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이 책의 특이한 점 한 가지는 대개의 경우 창작론이란 것이 작가들에 의해 집필되는 것인 반면에 이 책의 경우엔 편집자의 시선으로 다뤄지고 있는 창작론, 다시 말해 창작실무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서로 장단점이 있겠지만, 작가들의 창작론은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나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미화하고 포장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단점이 있다. 대신에 집필자로서의 좀더 구체적인 경험담, 독자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그림책 쓰는 법"은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과 함께 읽는다면 참 재미있는 경험일 수 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소설"에 대한 소설인데 책의 구성 자체가 재미있다. "1부-작가, 2부-편집인, 3부-비평가, 4부-독자"로 책 한 권에 얽힌 입장에 따라 다른 각각 다른 주체들의 등장이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우리나라와 확연히 다른 서구의 출판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설가로 입문하기 위해선 먼저 신춘문예나 각종 문예계간지, 대회에 입상해야 한다.  하지만 서구에서 소설가로 입문하기 위해선 출판사에 의해 책이 출간되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즉, 서구에선 먼저 편집자가 읽고, 출판할 만한가를 판별하고, 그런 뒤 작품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새로 엮어가면서 완성된 소설로 출판한다. 우리나라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문학작품에 대해선 거의 조언을 해주지 않으며, 작가나 시인들도 원치 않는다. 편집자들은 대개 띄어쓰기, 맞춤법 정도의 교정만 한 채 책으로 내보내므로 편집자들은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편집자들이 기획력을 발휘한다거나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주로 인문사회과학서들이 주종을 이룬다. 이런 경우에도 대개 한 명의 필자와 공동으로 작업을 하는 예는 드물고, 편집팀이 기획한 것을 여러 필자에게 나누어 청탁하고, 이를 한데 묶어 책으로 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림책 쓰는 법"은 서구의 사례를 든 것이니 당연히 국내의 경우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런 점들을 조금 유념하여 읽는다면 실제로 그림책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도 큰 무리 없는 작법이 될 수 있단 생각이 든다.  편집자와 창작자의 긴장이란 늘 기분 좋은 일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이 책과 실제 우리나라의 그림책 창작자 사이의 가장 큰 간격은 외국의 작가는 7년에 한 작품만 해도 먹고 사는데 별지장이 없는 출판시장을 갖고 있지만(우리는 수입해서까지 보지 않는가?) 우리는 한 달에 한 두편씩은 해줘야 그나마 남들처럼 먹고 살 수 있다는 차이다(물론 돈욕심에 공장차린 이들도 있다는 소문도 들리긴 하지만). 해묵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잘 먹히는 류의 광고 카피는 "내 아이는 남 다르다"는 것과 "내 아이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거다. 전자의 경우엔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후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림책은 범람하고, 그에 대한 안목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비평은 태부족인 상황에서...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은 아니어도 꽤 괜찮은 선택이라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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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와 모리츠(Max and Moritz)』 - 빌헬름 부쉬 지음, 곰발바닥 옮김 / 한길사(2001)

독서 시간은 10분이지만 생각할 거리는 ...

빌헬름 부쉬(Wilhelm Busch)의 초기작이자 가장 대표작이기도 한 막스와 모리츠 를 읽는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읽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진한 여운이 남았다. '허, 거참 신기한 일이다.' 읽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다 읽고 이틀 동안 다른 사무 때문에 몹시 바쁘게 보냈는데도 계속 생각이 나다니 드문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는 10분 동안 들었던 주된 생각은 "거 참 장난이 심한 녀석들이네." "헉, 그렇다고 주인공들을 그렇게 죽일 것까지야."란 생각이었다. 문학적으로 볼 때 작가가 주인공을 죽임으로써 뭔가 그럴 듯한 걸 보여주고, 보여줄 수 있던 시대는 호메로스 이래, 셰익스피어를 거쳐 괴테 시대에 이르러 사실상 막을 내렸다(내가 생각하기에 근/현대는 죽음을 소외시킨 시대이다). 그 이후 시대의 작가들 가운데 죽음을 이보다 더 의미있게 보여준 작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죽음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데 치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에서 죽음은 그렇게 서서히 비중 없는 지위로 격하되었고, 문학 기술상으로도 죽음을 다루는 솜씨는 점차 퇴보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지금 햄릿이나 오델로, 리어왕처럼 멋있게 혹은 의미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이 몇이나 되는가를...

하지만 빌헬름 부쉬가 그리고 있는 막스와 모리츠의 죽음은 해도해도 좀 심했다
(혹시 이걸 스포일러라고 비난받지는 않겠지). 책을 읽는 10분간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나는 작품 속 악동들이 볼테 아주머니의 닭들이 나무에 매달려 헐떡이는 광경을 지켜보며 토해냈을 법한 미소를 지었다. 혹자는 이를 "그로테스크(grotesque)"라고 말하는데, 그로테스크란 말은 우리가 무신경하게 종종 사용하는 '매너리즘','댄디즘'과 같이 역사적 연원이 있는 말이다. 그로테스크한 묘사, 그로테스크한 표현, 혹은 미술의 표현 양식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로테스크가 등장하는 시대의 공통점은 사회적인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는 시대라고 보면 된다.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출현하는 시대는 고대의 토템이나 페티쉬와 같은 괴이한 조형물로부터 중세의 교회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한 15-16세기, 절대왕정에서 근대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혁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집중된다. 빌헬름 부쉬에게서 그로테스크를 읽었다면 그건 아주 잘 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막스와 모리츠는 장난꾸러기를 넘어선 그야말로 악동이었다. '팜므 파탈'이 치명적인 요부를 의미한다면 이들은
'앙팡 테리블' 을 넘어선 '앙팡 파탈' 이라고 봐야 할까? 과부댁인 볼테 아주머니의 닭들을 교수형시킨 것도 모자라 재봉사 뵈크를 물에 빠뜨리고, 렘펠 선생의 담배 파이프에 화약 가루를 쟁여넣고, 프리츠 삼촌의 침대에는 온갖 벌레들을 잡아 넣어둔다. 결국 농부 메케의 곡식 자루에 구멍을 내는 장난 끝에 방앗간에 탈곡기에 들어가 낟알이 되어 거위들 먹이가 되고 마는데, 누구 하나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태우지 않는다. 그로테스크라 하면 커다란 도끼로 이마를 쪼개거나 전기톱으로 신체를 절단하는 식의 하드 고어 스타일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철 모르는 아이 둘을 방앗간 탈곡기에 집어넣고 낟알을 만든 뒤에 이를 새 먹이로 먹게 한다는 스토리도 충분히 하드 고어 스토리다.  동화책 하면 안데르센의 눈물겨운 성냥팔이 소녀를 자동적으로 연상하는 이들이라면 이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동화란 반드시 교훈(체제순응)적이어야 하는가?
무릇 "동화란 교훈이다."란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이 동화는 모리스 샌닥(Mourice Sendak) 의 동화들과 함께 끔찍한 악몽일 것이다.  모리스 샌닥의 대표작이기도 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하마터면 판매금지 처분을 받을 뻔 했다. 이유인즉 소년 맥스가 늑대로 변장하고 놀다가 엄마에게 야단을 맞자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너무 괴기스럽고, 아이들의 정서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종종 음식점에서 떼 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들을, 그런 엄마에게 대드는 아이들을 본다. 엄마는 아이들을 달래다 지치면 "너 이따 집에 가서 혼날 줄 알아"라고 으름장을 놓거나 좀더 심한 말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의 부아 긁는 소리를 한다. 좀 심하게 말하는 아이들 가운데는 "엄마를 죽여버릴 테야." 와 같이 듣기 끔찍한 소리를 내뱉곤 한다. 아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끔찍하다. 이때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건 근친살해에 대한 뉴스 같은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일본의 걸작 하드 고어 애니메이션 '우르츠기 도지'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제 부모의 시신이 토막쳐진 채 담겨있는)어려서 저 모양이니 크면 어찌될까? 하는 걱정일 수도 있겠다.



과연 빌헬름 부쉬나 모리스 샌닥 같은 작가들의 동화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할까?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결론은 물론 읽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고, 좀더 나아가서 잘 읽도록 도와주고, 널리 권장해야 한다는 거다.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니 좋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권하는 첫 번째 이유다. 물론 더 중요한 이유는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에 있다. 이 책의 저자 빌헬름 부쉬는 아동문학을 전공하거나, 이 분야에 제법 관심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선 그다지 대중적인 인지도가 없는 편이지만 독일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고, "막스와 모리츠"는 독일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가운데서도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선진국에서 널리 읽도록 하고 있으니 우리도 읽도록 하자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빌헬름 부쉬는 1832년 4월 15일 독일 하노버의 작은 마을인 비덴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기계공학자로 살아가길 바랐기에 부쉬는 부친의 뜻에 따라 괴팅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뮌헨에서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그들만의 예술활동을 한다. 

사회변혁기에 출현하는 그로테스크와 풍자
앞서 그로테스크란 역사적 격변기에 주로 등장하는 기법이라 말한 바 있는데,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그로테스크만은 아니다. 이런 시기엔 '신랄한 풍자' 역시 등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로테스크는 종종 풍자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되고, 10대의 성 문란이 가속화되면서 출현한 피가 낭자한 호러영화들은 풍자이면서 동시에 그로테스크이기도 했다. 호러영화의 모든 공식을 풍자하기로 작심한 "스크림"은 1970-80년대의 '청춘'호러영화의 공식 - 섹스를 하면 죽는다. 처녀가 아니면 죽는다 - 를 비틀고, 그 후에 나온 영화는 '처녀면 죽는다'는 공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로테스크는 이렇게 풍자와 결합한다. 빌헬름 부쉬가 태어나고 살았던 1800년대 초중반의 독일은 어떤 사회였을까?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념한 곡이었다. 1812년엔 이것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또 있었는데, 이 해 영국의 런던에는 세계 최초의 광고 대리점이 창설되었다. 즉, 자본주의가 보다 중요한 지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의 패배는 전유럽에 '복고(정통, 보수, 반동)주의'의 바람 '메테르니히 체제' 가져왔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기운은 이미 전유럽 시민사회에 속속들이 스며들었으나 메테르니히 체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회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1848년 맑스,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작성하여 출판한다. 1866년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의 독일에서 자유주의와 시민에 의한 개혁은 발 붙일 자리를 잃었고, 독일 사회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위한 '병영사회'가 되어갔다.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한 뒤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독일식으로 바꿔보면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는 신무기인 후장식 소총의 도입이 아니라 프로이센 교사들의 몽둥이 찜질에 의한 훈육 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독일 국민들에게는 1866년부터 일반적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는 모든 면에서 군대식으로 각을 잡은 직각형 인간들을 선호했다. 그들에게 직장에서 빈둥거린다거나 공연히 공적인 장소에서 모나게 행동하는 일탈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사회적 책무라고 여겼다. 파시즘은 직각을 사랑한다. 빌헬름 부쉬는 이런 사회 분위기와 관료들을 비롯한 통치 체제를 날카롭게 풍자하는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한다. 

막스와 모리츠 - 일탈이 곧 죽음인 사회
그렇게 생각해보니 빌헬름 부쉬의 "막스와 모리츠"도 이해될 수 있었다. 막스와 모리츠의 장난은 다소 심하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난이 마을의 평온을 잠시 흔든 것이긴 하지만 볼테 아주머니는 닭털을 뽑아 맛 좋은 닭 훈제구이를, 양복쟁이 뵈크는 젖은 옷을 말리면 되었다. 모리츠의 삼촌도 벌레들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아 죽인 뒤에 다시 평온한 잠자리에 들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평온한 마을은 막스와 모리츠를 용납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탈곡기에 들어간 뒤 고루 획일적인 낟알이 되어 나왔다. 빌헬름 부쉬의 이런 풍자가 나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이 동화책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작가 소개도 빈약하다. 아동문학평론가 김경연 선생의 미디어 리뷰를 보니 번역에도 다소 문제(번역은 이 작품의 풍자적 성격보다는 막스와 모리츠의 ‘장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 김경연, 국민일보)가 있었던 모양이다. <경향신문>에 게재된 이 책의 옮긴이들이 했다는 말 "어린이책 코디네이터 모임 ‘곰발바닥’은 유익하지는 않아도 실컷 웃을 만한 책”이라고 소개했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건 둘째고, 화가 날 지경이긴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이 지닌 감동이나 생각할 거리의 유익함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역사적 배경 따위 몰라도 괜찮다.



좋은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를 '기독교 이전의 로마'와 '기독교 이후의 로마'로 구분한다. 기독교의 유일신앙이 기존 로마의 다신교적인 기풍, 즉 자유로움과 융통성을 앗아갔다고 비판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중국을 보면 성리학 이후의 중국에선 여성의 발을 옭죄는 전족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어린이 교육에 있어 창의력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창의력은 자유로운 상상에서 비롯되지만, 내 아이가 태양을 검게 그리면 부모들은 뭔가 우리 아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태양은 붉은 것이란 교육을 받은 부모가 아이들의 창의력에 간섭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미래의 어른이란 근시안적인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안 아이들의 창의력은 저절로 고갈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동화를 마치
"호랑이와 곶감"에서처럼 울면 '호랑이가 와서 물어간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윽박지르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삼기 위해 만들었고,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동화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 설정 자체가 이 동화를 오해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만약 이 동화에서 우화적인 풍자의 교훈이 아닌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훈육의 의미로서의 풍자로 이해한다면, 이 책이 주는 교훈은 실로 비루한 것이 되고 만다. 독일인들이 빌헬름 부쉬의 동화를 오해한 결과
- 프로이센의 병영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의 일탈을 강하게 통제하고, 몽둥이 찜질을 가하고, 훌륭한 병사, 국가를 위한 동량으로 길러내 -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갖춘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장 폭력적인 나치 독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 결과 막스와 모리츠 같은 사회적 일탈자들은 그들이 탈곡기에서 낟알이 되어 나온 것처럼 강제수용소란 탈곡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고, 파시즘이 원하는 직각형 인간으로 바뀐 '과거의 어린이, 미래의 어른'들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가장 민주적인 제도를 갖춘 나라일지라도 가장 민주적인 시민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민주국가 수립은 요원한 일이 아닐까? 빌헬름 부쉬의 이 책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막스와 프리츠와 같은 악동, 사회적 일탈을 꿈꾸는 어린이가 아니라 그들을 탈곡기에 집어 넣고 낟알로 만들고 싶은 우리 어른들의 몫일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자유의 폭이 어느 정도인가 알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타인에게 허용하는 자유의 폭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된다. 당신이 타인에게 허용하는 자유의 폭만큼 당신에게도 그 자유가 허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일탈'의 허용범위가 넓고, 그만큼 폭력적인 범죄의 비율이 낮다. 그러나 획일성이 강요되는 사회,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사회는 그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의 범위가 협소하고, 자신들과 조금만 다르면 폭력적으로 이를 교정하려 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여기고, 이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며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식은 결국 폭력적인 해법을 불러들이게 된다.  일탈에 대해, 마이너리티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전체주의, 편견에 가득찬 협소한 정상(?)의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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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판타지』 - 김서정, 굴렁쇠(2002)


문학의 위기를 말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영상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평자들은 소설은 이제 영상이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글을 쓰라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래서야 문학은 더욱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류의 주장들 - 문학은 영상매체가 따라올 수 없는 표현, 보다 복잡한 심리묘사와 난해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는 방식으로 문학성을 고수해야 한다 - 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결국 이런 류의 주장은 모더니즘이 일찌기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앞으로의 문학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한 예술로 점차 사멸해가는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서구의 고전음악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현재 일정한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문학의 비타협적인 속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세상과 불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이때의 정치적이란 말의 의미는 현실정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류권력과 불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뤼시엥 골드만은 소설 사회학을 위하여에서 소설을 "타락한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타락한 사회에서의 가장 타락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소설 문학은 이미 태생적으로 타락한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장르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여전히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로서의 위치를 놓치지 않는다.

 

문학의 위기란 결국 엄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여전히 타락할 건덕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을 타락한 사회라고 인식한다면 할수록 소설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타락한 방식의 서사이므로 앞으로도 도 많이 추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떻게 타락할 것인가? 그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욕망의 무한 질주를 앞서는 서사를 채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정반대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로 나는 판타지를 꼽고 싶다. 판타지하면 최근 성공리에 영화 시리즈를 마감한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이 소설 역시 출간 이후 금세기 이내 영화화되기는 어렵다는 평을 들었던 작품이다. 결국 세기를 넘겨 영화화에 성공했다.

 

판타지에 관한 책들을 찾다보니 주로 아동문학과 관련한 분야에서 세 권의 책을 보게 되었는데, 어린이 문학평론가인 김서정이 번역한 마리나 니콜라예바(Maria Nikolajeva)의 용의 아이들과 김서정 자신의 책 멋진 판타지, 이재복의 판타지동화세계가 그것들이다. 앞서 말한 『용의 아이들』은 어린이들이 주독서대상인 판타지동화에 대한 기호학적인 접근을 통해 어린이문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에 제대로 된 아동문학 개론서가 없는 현실이고 보면 『용의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이 책은 그런 한국적 현실에 꼭 필요한 책이면서도 한국적 현실 자체는 누락되어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의 어린이문학 현실에 필요한 책이지만, 한국의 어린이문학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서정의 멋진 판타지는 '어린이문학평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굴렁쇠'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체가 3부의 구조로 꾸며져 있는데, 제1부 '판타지는 멋있다'를 통해 판타지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다. 판타지란 그리스말에서 나왔는데,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 '현실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상력의 힘을 빌어 어떤 특정한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 활동이나 힘 또는 그 결과'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판타지는 '현실 세계의 법칙을 깨뜨리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단순한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요소들이 어떻게 '다른 세계'에 대한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만의 세계를 뛰어난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놓아, 읽는 이를 놀라고 감탄하게 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판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전래동화도 판타지인가? 저자는 "전래동화는 이 세상이, 사람들의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소박한 윤리, 도덕으로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라고 말한다.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이 전래동화"라고 말한다. 매우 재미있는 해석이고, 공감할 수 있는 정의였다. 이 정의를 통해 우리는 전래동화 역시 판타지이며 훌륭한 전래동화, 판타지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현실과 괴리된 꿈같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속성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제1부에서 판타지의 여러 덕목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2부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구의 동화들 - 단순히 동화라고 규정할 수 없는 철학우화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 - 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미하엘 엔데, 필리파 피어스, 루이스 캐럴, 엘윈 브룩스 화이트, 앨런 알렉산더 밀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며(위엔 언급된 작가들 이외에도 많으나 편의상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 언급)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한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필리파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특이한 판타지이다. 반지의 제왕처럼 선과 악 사이의 처절한 전투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기이한 캐릭터들이 줄이어 나오지도 않는다. 도리어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풍경들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어떻게 판타지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밤중 톰은 시계를 바라보며 환상,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원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은 일순간의 꿈과 같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진부하기 짝이없는 교훈을 필리파 피어스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재미란 설탕가루에 버무려 준다.

 

다른 한 편으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비평 '내 이름은 꼬마 혁명가'이다. 그것이 한국사회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전세계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어려서는 부모, 가족의 참견, 자라서는 학교, 사회의 참견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이가 어른이 되길 꿈꾸는 것은 더이상 부모의 참견을 받고 싶지 않다는, 어른이 되면 어린이가 할 수 없는 뭔가 그럴 듯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참 많을 것이라는 환상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어린이의 마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눈치를 안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나마를 즐기기 위해 어른이 된다는 건 참 비극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어진다. 작은 호기심에 하루가 가는 줄 몰랐던 시절, 떠 가는 구름을 보며 시시각각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온종일 쳐다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삐삐'는 어른과 아이의 환상을 한 몸에 버무린 존재다. 삐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는 어른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어른들의 환상 속에서 그는 돈 많은 어린이다. 아이 입장에서도, 어른 입장에서도 삐삐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존재다. 삐삐가 반권위적이란 점만 놓고 보면 그는 완벽한 아나키스트이다. 삐삐의 뒤죽박죽 별장에서는 세상의 권위, 예절, 질서, 체제 따위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삐삐가 그런 전복적인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을 번쩍 들만큼 엄청난 힘과 해적 선장 아버지가 물려준 금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천진난만하여 어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말의 힘이다. 그렇다고 삐삐가 무척 논리적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삐삐는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어린이기 때문에 보이는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논리를 가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세상은 논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어른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탓에 그들 자신의 논리가 천진난만한(?) 삐삐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제3부 '독일동화문학과 판타지'는 208쪽에 불과한 얇고 작은 이 책에서 가장 작은 쪽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이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이 이 책의 전체에서 가장 활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 - 독일동화문학은 낭만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독일 낭만주의는 독일 정신의 한 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 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아닌 의문이 생겨났다. 그것은 판타지 문학 전체에 대한 것과도 연결된다. 전래동화란 개념, 전래동화가 본격적으로 채집되기 시작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러서다. 낭만주의란 사조는 결국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연모한 것처럼 말이다. 낭만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은 반합리주의와 연결되고 이는 다시 파시즘과 연결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연구가 없어 보인다.

 

앞서 판타지 문학이 지닌 덕목들 - 다른 세계에 대한 열린 상상력과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 교훈성과 전복적인 기운들 - 을 일거에 무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서 나는 무척 아쉬움을 느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은 이중의 소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는 과학, 과학연구에는 그 어떤 제약도 주어질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란 의미에서의 소외이고(이는 다시 말해 과학은 시민사회의 도덕률이나 윤리에서 자유로운 어떤 것이라는 위험한 규정이 된다), 그런 과학자들조차 국가 이데올로기에는 종속된 존재여야 한다는, 즉 국가구조의 하부에 속해야 한다는 규정을 통한 소외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판타지 문학에 대입시키면 판타지에는 국경이 없으나 판타지 문학에는 국경이 있다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옛이야기는 동화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판타지 문학은 독일동화문학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전래동화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는 다시 민족과 연결된다. 판타지문학이 '다른 세계'를 다룬다 하더라도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일 수 없는 것처럼 판타지 문학의 태생 또한 민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판타지 문학이 한국 혹은 동양의 판타지 문학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경험한 세계대전에 대한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두드러진 암시는 모르도르의 화산에서도 알 수 있듯 '불'이다. 세계을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불에 대한 암시가 대량폭격과 소이탄, 핵에 의한 공포를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 방식의 마법 - 가령, 님버스제 최신 모델의 빗자루 - 를 표현하는 것 이 또한 앞으로 판타지 문학이 풀어야 할 숙제일지 모르겠다. 판타지 문학이 과거 낭만주의 속에서 민족적 뿌리를 찾는 시도로서 행해진 전래동화 채집이라는 민족적 뿌리를 거부할 필요도, 거부할 수도 없지만 가장 순수한 듯 보이는 판타지 문학 역시 타락한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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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개 - 가브리엘 벵상, 열린책들(2003)



김중식의 시집 <황금빛 모서리>에는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이라는 다소 장황한 제목의 시 한 편이 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된다 돈 한푼 없이 대낮에 귀가할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나는 정확하게 20년간 헤어져 살던 어머니와 처음 대면했다. 그 이전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3살 때, 그리고 국민학교 1학년의 기억 속에 단 두 번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따라 천호동 423번지로 들어갔다. 1층에서는 창녀들이 붉은 등을 밝혀놓은 쇼윈도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2층의 닥지닥지 붙은 벌집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정액을 온몸으로 끌어내는 일을 했다. 나는 그 윗층에 살았다. 423번지 골목을 따라 내가 사는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불과 20여 미터였지만, 그 20여 미터를 걸어가는 일이 내게는 세상 더할 것 없이 굴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에게 내 낯을 익히라고 권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팔에 안겨 왔다. 나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내 나이 23살의 여름이 그렇게 사창가 3층 옥탑방에서 저물어 갈 줄은 몰랐다. 김중식은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안인데/ 거기보다도 우리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 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난 그 기분을 알듯 모를 듯 하다. 나는 그들보다 허기져 보이지 않았고, 우리 집 여자들이 그들보다 더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나는 차라리 더 견딜만 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 한 명 뿐인 남자가 되어버린 나는 어느 순간, 어머니에게 매일 용돈을 타 가는 사내가 되었고, 나는 기생 품에 안긴 이상처럼 그렇게 매일 얼마간의 돈을 타서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서는 이 세상 더할 수 없는 고결한 시인들의 시를 배웠고, 작가 세계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나의 하교길은 사창가로 향했다.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내게 현실은 늘 너무나 구체적인 진실이었다. 나는 사창가에 살고 있는 18살짜리 여자 애를 알았고, 그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두 번이나 애를 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기둥 서방 오래비들이 포진해 있지 않았고, 기둥서방 아저씨들이 외곽 경비를 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을 지키는 남자들의 연령은 그대로인데 그곳의 상품인 여자 아이들의 꽃은 아직 채 영글기 전에 팔려야 했다. 아니, 그래야 팔릴 수 있었다. 내게 세상은 상상할 여지가 별로 없는 곳이었다. 똑바로 서서 뛰어다니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어머니에게 버림받았고, 아버지의 널찍한 등판을 기대보기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벌집 방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밤새 수음을 했다. 



밤의 세상과 낮의 세상 사이에서....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밖에 없었다. 모든 스무살 짜리 남자는 20년이 흐른 뒤엔 40살의 남자가 된다. 스무살의 남자는 분명 마흔살의 남자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스무살의 남자는 선인을 알고, 악인을 미워할 줄 안다. 진실의 언어와 가식의 언어를 구분하는 법도 알고 있다. 스무살의 남자는 지미 헨드릭스도, 짐 모리슨도, 제니스 조플린도 알지만 마흔살의 남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더이상 순수하다고 할 수 없는 마흔 살의 남자는 스무살의 남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하는 법을 배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군가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무게를 견뎌내야 한다. 자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은 불행히도 타인을 사랑할 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그 무게를 견디는 법을 배우고자 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하다. 나는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일이 여전히 편하다. 가브리엘 벵상 (Gabrielle Vincent)의 일러스트로 꾸며진 한 권의 책이 여기 있다. 동화책이라고 해야할까? 글쎄, 만약 버림받는 공포를 되새기고 싶은 자학증세가 있는 어린이가 아니라면 이 책을 즐거워하며 보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에게 말 안들으면 이렇게 버릴테다. 하고 겁주기 위함이 아니라면 이 책은 동화책이라기 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책이다. 



인간이 가장 처음 버림받은 경험을 하는 것은 언제일까? 아마 그 때는 어미의 자궁으로부터 억지로 밀려나와 탯줄이 끊기는 순간이 아닐까?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 버림받는 경험은 그토록 원초적인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공녀, 소공자"와 같은 동화를 고전이라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읽도록 한다.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동화와 달리 현실 속의 우리들이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므로 우리들은 소공자, 소공녀를 통해 돈많고, 자상한 보호자를 상상한다. 부모에게 버림받이본 경험이 있는 자식의 상상력이란 늘 그렇게 음울한 구석이 있는 법이다. 따스함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부재하는 상상력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토록 완전하게 주변과 단절된 경험을 하게 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때로 어머니가 없는 아파트 현관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경험은 그토록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경험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브리엘 뱅상은 이 책에서 글을 통해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 버림받은 기분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작가는 그림 속에서 색채를 제거한다. 우리는 단조로운 모노톤의 세계에 펼쳐진 막막함, 대책없는 기분을 절감한다. 그는 이 막막함과 대책없음을 구질구질하게 드러내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그는 최대한 냉정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이 모든 것을 끌어낸다. 크로키처럼 자유자재로 순식간에 그려낸 듯 그림이지만 그 안엔 냉혹할 정도로 섬세한 관찰이 들어 있다. 첫 장을 펼쳐보면 차창 밖으로 던져진 개가 등장한다. 죽어라 달려보지만 자동차는 어느새 저만큼 영화 속 롱테이크(Long take)의 한 장면처럼 멀어져 간다. 힘을 다해 달려가보지만 지친 개는 이윽고 멈춰설 수밖에 없다. 꼬랑지를 다리 사이에 집어넣은 채 잔뜩 움츠린 표정의 개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연상해보는 일이란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본래 고독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완전하게 단절된 속에서도 불가사리 새살 돋듯 새로운 인연을 시작한다. 비록 버림받은 인간이라도 영원히 버림받는 법은 없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인간은 누구라도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버림 받아본 짐승들이 그러하듯 버림 받아본 인간 역시 마음을 모두 내어주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평생의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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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휴즈의 작품은 국내에선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외국에선 제법 인기있는 작품이라 비룡소판의 삽화를 그린 '앤드류 데이비슨'이 아닌 다른 작가의 삽화로 된 판본도 있다.

무쇠인간 | 테드 휴즈 지음 | 서애경 옮김 | 비룡소(2003)

내가 '테드 휴즈(Ted Hughes)'를 알게 된 건 그가 1998년 10월 28일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영국의 계관시인이라는 유명세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의 아내이자 같은 시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비아 플라스가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 시인으로서 테드 휴즈의 성공과 유명세에 비해 실비아 플라스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며 자신의 재능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비관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실비아 플라스가 누리는 명성에 비해 테드 휴즈는 상대적으로 도리어 왜소해진 인상이 강하지만 테드 휴즈 역시 T.S.엘리어트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영미시인 중 한 명이다.

실비아 플라스의 무덤엔 오늘날까지도 고인의 비석에서 남편 테드 휴즈의 성을 파내려고 덤비는 공격적인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들 혹은 실비아 플라스 시의 매니아들 때문에 여전히 훼손 당하고 있다. 그녀의 비석엔 실비아 플라스 휴즈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을 둘러싼 세간의 많은 입방아들로부터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죽음 35주년을 맞이하여 "생일편지"라는 시집을 출간한다. 어쩌면 실비아 플라스와 그의 가족에게 있어 그녀의 자살이 더욱 더 비극적인 사건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녀 자신의 행동보다 그녀의 죽음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던 이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워즈워드이래 영국 시인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계관시인의 지위를 얻은 '테드 휴즈'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열한 살인교사자 혹은 아내를 죽인 푸른 수염은 아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자, 철학동화를 지은 동화작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동화 <무쇠인간(The Iron  Man)>은 영국의 어린이 문학전문지가 선정한 "앞으로 100년 뒤에도 살아남을 고전 열권"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책이기도 하다(물론 영어로 쓰인 20세기 아동물 가운데서). 테드 휴즈의 이 동화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다루어야 할 두 가지 이야기 중 하나는 테드 휴즈의 아내. 실비아 플라스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1999년 워너브라더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Iron Giant)>이다. 테드 휴즈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실비아 플라스 때문이라면 테드 휴즈가 동화작가이기도 하단 사실을 알게 해준 것은 바로 <아이언 자이언트>란 애니메이션 영화 때문이었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1957년 무렵 미국의 메인주 록웰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57년 록웰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 <아이언 자이언트>가 만만치 않은 영화가 될 것이란 예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데, 그런 예감을 확신으로 바꾸는 이름은 이 영화의 감독 브래드 버드가 이미 TV 만화영화 시리즈인 <심슨 가족>의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란 사실이다. <심슨 가족>은 잘 알려진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한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미국 TV판 아카데미라 할 수 있는  애미상을 10번에 걸쳐 수상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8번가의 기적'의 각본을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만화영화란 측면에서 오랫동안 디즈니식 애니메이션과 치열한 경쟁을 해왔던 워너브라더스에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기도 했다.

결과는? 미국내 흥행에 참패했고, 미국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디즈니식 판타지에 익숙한 국내 영화관에서는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바로 비디오로 출시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흥행에 참패했다고 해서 영화도 꽝이라는 선입견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개봉될 당시 <누벨 옵세르바떼르>는 "훌륭하다. 그리고 충분히 감동적이다" 라며 이 애니에 대해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훌륭한 애니메이션으로 매니아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의 원작이 바로 테드 휴즈의 "무쇠인간"이었다. 이 책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국내 동화시장에서 어지간히 빛을 보지 못한 편이라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한 듯 하다. 

국내의 어린이 도서 시장에서 인기있는 책들은 비교적 밝은(?) 내용과 색채를 이용한 작품들인 편인데 진한 잿빛 표지에 전혀 귀엽지 않은 로보트 하나가 새겨져 있고, 뒷표지엔 자동차 폐차장이 새겨져 있다. 표지만 보고도 암울한 느낌이 절로 든다. 이 책의 부제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닷새 밤 동안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책의 첫장에는 "딸 프리다와 아들 니컬라스에게"란 저자 테드 휴즈의 헌사가 들어 있다. 테드 휴즈가 어머니를 잃은 두 아이들을 위해 지은 동화책인 것이다. 

이 책은 닷새 동안 아버지가 어린 두 남매에게 해주는 이야기 형식을 띄고 있어 전체가 5개 장으로 구분된다. 물론 내용은 영화와 조금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테드 휴즈가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다. 책의 간단한 내용을 소개해보면 바닷가 마을에 어느날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무쇠인간이 떨어진다. 무쇠인간은 이 마을의 농기구들을 먹이로 삼는데, 마을 사람들은 농기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쇠인간을 유혹하는 덫을 만들어 놓고 유인한다.

그러던 어느날 어린 소년 호가스의 우연찮은 도움으로 무쇠인간은 덫에 사로잡혀 땅 속에 파묻히게 된다. 무쇠인간은 땅 속에서 다시 일어나 마을 사람들의 농기구를 다시 집어 삼킨다. 마을 사람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군대를 불러 무쇠인간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어린 소년 호가스는 무쇠인간을 사로잡히게 만든 자신이 나서 무쇠인간과 협상을 시도한다. 마을 인근에는 처리곤란한 고철더미가 쌓여 있었는데, 무쇠인간에게 이 고철들을 먹도록 하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지만 호가스는 무쇠인간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무쇠인간이 이에 응하면서 인간소년과 무쇠인간 사이의 기묘한 우정이 싹트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수억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던 별이 지구를 향해 날아와 커다락 박쥐와 도마뱀을 섞어 놓은 듯한 우주 괴물 우박천룡을 떨어뜨린다. 우박천룡은 지구상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전쟁의 소음을 들으며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를 제거하기 위해 날아온 것이었다. 소년 호가스는 무쇠인간에게 부탁해 우박천룡과 일전을 겨루게 하는데... 뒷 이야기를 마저 다하면 이 감동적인 동화책에 대한 트레일러가 될 터이니 참도록 하겠다.

이 책의 표지부터 시작해서 본문의 삽화까지 어째서 이토록 암울한 색채와 느낌을 주는가 했더니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가 환경 오염과 전쟁으로 인한 지구 파괴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전망이 모두 암울한 것은 아니다. 결국 인간 소년과 우정을 나눈 무쇠인간의 기지와 소년의 용기가 합쳐져 우박천룡과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결국 트레일러 짓을 함...흐흐). 이 책의 저자 테드 휴즈는 제2차 세계대전이란 암울한 전쟁을 겪었고, 이 책이 한창 처음 발표된 1968년엔 미국과 소련이 세계 패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들은 쿠바에서,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베트남 정글에서 맞붙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우주에서 날아온 괴수조차 지구상에서 연일 벌어지는 전쟁의 소음으로 인해 날아왔다고 말한다. 


- 앞서 말한 다른 삽화가의 판본으로 된 작품 이미지

무쇠인간과의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우박천룡은 본래의 본성을 찾아 우주에 있는 자신의 별자리를 찾아가 지구의 무쇠인간과 소년 호가스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아마도 테드 휴즈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건 비단 아버지 테드 휴즈만의 소망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아버지, 모든 어머니의 소망이기도 하다(우울한 소식 한 가지는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가 사랑했던 아들 니콜라스가 지난 2009년 3월 47세의 나이로 우울증을 앓아오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다. 그는 한때 알래스카 주립대에서 해양학과 교수로 재직했는데 대학을 그만두고 자신의 집에 도예작업실을 차려놓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 부부가 그의 부모들과 함께 보낸 단란한 한 때, 이때만 하더라도 이들 부부에게 닥쳐올 불행을 미처 예감하지 못한 듯 싶다.(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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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8 17:31

    You want to ask something but you can't .
    You stare into every face
    Trying to recognise somebody.
    They ignore you. Then the light goes red
    And they all surge past you.
    Then you see me in my car, staring at you.
    I see you thinking: ought I to know him?
    I see you frown. I see you trying
    To remember - or not to remember.

    -The City 중에서 by Ted Hughes-

    Sylvia Plath! 영어 교과서에서 Daddy라는 시를 배우고 바로 마약처럼 빠져든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Ted Hughes도 알게 되었구요. 1998년 Ted Hughes가 죽고 같은해 그들의 딸 Frida Hughes의 시집이 발간되었을 때 Times지는 서평에 두 사람 Hughes의 시를 소개했습니다. 모두 Sylvia에게서 영감을 얻어 쓴 시들로요. 그때 copy해둔 시의 일부입니다.Ted의 시를 읽으면서 Sylvia를 향한 진심이 너무 느껴져 울컥했습니다. 그전에는 저도 Ted를 좀 미워했었지만요.

    우울증은 참 무섭지요!
    11월 을씨년스러운 밤에 바람구름님 탓으로(?) Sylvia시집을 꺼내들고는 가슴 먹먹해하고 있습니다.

    • 2010.11.08 17:47 신고

      실비아 플라스를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저와 너무도흡사하지만 테드 휴즈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저와는 조금 다르겠지요.
      때때로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고, 쓰고 다루면서도 인간에 대한 이해는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영원히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사랑하기에도 미워하기에도 참으로 가슴 먹먹한 존재들이란 거죠.

      알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래서 사랑에 지치게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뭔 말하는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2. 2010.11.08 20:14

    비밀댓글입니다

  3. 2010.11.08 20:18

    어떤 때는 입밖에 내지 못하는 말을 글로는 쏟아낼 수있어서 글은 참 좋은 치료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말들은 입으로는 못하지요. 넘 찌질해서^^;;.

바람이 불 때에  |  레이먼드 브릭스 지음 | 김경미 옮김  |  시공주니어(1999)

이 책의 저자 이름을 보고 이 책이 그의 다른 책들 가령 "스노우맨, 산타할아버지의 휴가, 곰" 등을 연상하는 분들은 레이먼드 브릭스(Raymond Briggs)를 잘 아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는 약간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른 작품들이 일종의 해피엔딩에 아동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이 책은 아동들이 읽기 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혹은 만화를 이용한 일종의 반핵계몽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17초. 핵폭탄이 투하되자 폭격기 승무원들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특수방안경을 착용했고, 히로시마 상공 570m 지점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은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완수했다. 승무원들은 진홍색의 섬광을 보았다. 원자탄은 십만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섭씨 300,000도에 이르는 불기둥을 뿜어냈고, 1초 후 불기둥은 반경 250m로 부풀어올랐다. 버섯구름은 7km 상공까지 솟아올랐고, 폭발로 인한 열반응은 16km 상공까지 미쳤다. 아무런 사전경고 없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폭발 즉시 그리고 며칠동안 대략 14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 3일 후 나가사키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7만 명이 죽었다. 그후 5년간 방사능에 피폭된 13만 명이 더 죽었고, 그 외 수십만 명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불구가 되었고, 자식들에게까지 유전되는 질병을 얻었다. 전쟁은 끝났다. 미/영/소를 비롯한 연합국 49개국과 독/이/일 등 추축국 8개국이 참전하여 1조 6,000억의 재산 손실과 2,700만의 전사자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이 폭발하는 장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세계대전을 경험한 인류는 과연 반성했을까? 아니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 이 만화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70년 레이몬드 브릭스가 살아왔던 20세기의 전반기에 경험한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내면서 더 이상의 세계대전은, 더 이상 전쟁은 있을 수 없다고 낙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인류에게 지불하도록 만든 피의 교훈이, 핵의 공포가 인류를 공멸시킬 수도 있는 전쟁을 억제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이런 낙관적인 기대는 오래지 않아 착각이었음이 밝혀진다. 


파멸의 시한폭탄인 핵은 그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베트남전 당시엔 전술 핵폭탄의 사용이 진지하게 고려된 바 있었고, 그외 국지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진지하게 혹은 너무 경솔하게 사용을 검토해온 무기였다. 많은 이들이 핵전쟁이 벌어진 적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이미 핵무기와 상당히 친숙하다는 것을 잘 모른다. 미국은 이미 여러 전쟁에서 특히 걸프전을 통해 '열화우라늄탄'이라는 핵무기를 사용해 왔고, 그 결과 전장으로 변한 지역의 일반인들은 물론 참전한 병사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열화우라늄탄"의 방사능에 피폭되어 병이 나고 있다. 이름하여 '걸프증후군'이 바로 그것이다. 

- <바람이 불 때에>의 주인공 부부는 정부의 핵방어 지침을 충실히 따라 주택의 외부 유리창에 흰 페인트를 칠하고, 집 안에 나무판자를 이용해 핵대피소를 만든다(이건 당시에 실재했던 정부의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레이몬드 브릭스가 그리고 있는 "바람이 불 때에"는 바로 그런 지점, 인간이 핵에 의한 공포 속에 놓여 있던 시점에 그려진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동서양진영 간의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기까지 동서냉전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개발하고, 1959년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뒤,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인 중소 관계가 악화되고 베를린에는 장벽이 설치되고, 1962년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이 무렵 유럽에는 소련의 위협에 대응한다면 미국의 핵무기들이 배치되기 시작한다. 1965년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 북폭을 실시하기 시작한다. 굳이 유럽이 아니라 어디에서라도 핵전쟁의 위험은 커져만 갔다. 

이 작품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바로 그 무렵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 무렵은 아직 핵무기의 공포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마리 퀴리와 이렌느 퀴리가 우라늄을 다루면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방사선의 위험을 미처 알지 못해 두 사람 모두 암으로 사망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인 존 웨인은 영화  1954년, 서부영화의 전성기를 누리고있던 존 웨인은 MGM 영화사로부터
"징기스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는가"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를 찍기로 되어있던 미국 애리조나의 피닉스 외곽 120km 사막지대는 1952년까지 핵실험이 있었던 방사능 오염 지역이었다. 방사능의 위험을 잘 몰랐던 제작자는 정부에서 허락한 문제의 지역에서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이때 영화 <정복자>에 출연하거나 종사했던 스태프 117명과 수백 여명의 엑스트라 중 95%가 암으로 5년 안에 사망했다. 그중에는 존 웨인과 함께 출연한 감독 딕 포웰, 수잔 헤이워드, 아그네스 무어헤드도 포함되어 있다.  


국가와 정부는 적의 핵공격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이쪽도 핵무장을 추진하고, 상대방의 핵무장에 보복하기 위해 더욱더 강력한 핵무장을 준비한다. 미국이 1940년부터 1995년까지 핵전쟁 준비를 위해 투입한 돈은 대략 3조 5천억 달러로 추정된다. 1995년 이후 계속되었던 탈냉전의 분위기 속에서도 미국은 매년 270억 달러를 군비에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핵전쟁 방지를 위해 투입한 돈은 22억 달러에 불과하다. 군비를 위해 투입한 돈의 10분지 1도 안 되는 금액이며, 그렇게 쓰인 돈 역시 자신들의
핵전쟁 회피 노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국의 핵전력을 제한하기 위해 쓰인 돈이다. 그런 중에 자국의 국민들에게까지 핵전쟁에 대비해 안전한 대피책이라고 알려준 것이 바로 레이몬드 브릭스의 이 책에 나오는 대피법이었다.

레이몬드 브릭스는 바로 그런 정부 정책의 허구성과 핵전쟁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이 만화를 그렸다.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잡지는 핵의 공포를 보여주기 위해 핵공격 당시 피폭된 한 시민에게 필요한 의약품의 총량을 계산한 바가 있는데(그렇다고 이 환자가 치유되어 살아남는다는 뜻은 아니다.) 산소통 42개, 붕대43.2km, 혈액 36리터, 체액 47.1 리터, 간호사 3명, 몰핀, 페니실린 등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어느 병원도 단 한 사람의 피폭자를 살릴 수 있을 만큼의 의약품을 확보하고 있지 못했다. 즉, 핵폭발이 일어나면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레이몬드 브릭스는 평소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즐겨 그려왔던 인물인데, 이 작품에서만큼은 전혀 환상적이지 않은, 차라리 냉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리얼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느꼈던 핵의 공포가 그만큼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해 무언가 결론을 짓기는 참 쉽다. 이젠 핵의 공포가 사라졌다고 믿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동서냉전의 시대가 저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 되물어야 한다. 이 미친 시대, 12명의 사우디 인들이 비행기를 납치해 미국을 공격하자 미국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해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안전한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 중에서 실제로 동서냉전의 원인처럼 보였던 이념이 실제 전쟁의 동인이었던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의 실제 원인은 늘 전쟁으로 이득을 보고자 하는 이들이 전쟁을 통해 이득을 보아왔고, 그들의 손에 무기가 쥐어져 있는 동안 전쟁은 계속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브릭스의 "바람이 불 때에"처럼, 핵전쟁이 일어나면 그 결과 확실한 건 한 가지다. 우리들 중 누구도 살아서 별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참고로 이 책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그런데 그 작가는 레이몬드 브릭스가 아니다. 그가 감수를 하긴 했지만 실제 감독은 지미 데루 무라카미란 작가다. 이 작품과 관련해서 추천하고픈 애니메이션 영화는 "아이언자이언트"다. "아이언 자이언트"의 원작자는 실비아 플라스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다. 한 번 꼭 같이 살펴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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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 사회복지와 연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배척의 원리는 자유롭게 사귀도록 내 버려둔다면 타락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 알란 튜링


영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안나 피엔버그(Anne Fienberg)"는 이 책을 통해 "남과 구분되는 한 아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세기 말엽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연대(solidarity)의식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한다. 그 결과 수많은 시민단체들의 이름에 "XX연대"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걔중에는 연대란 말의 본디 의미도 모르는 체 그저 유행하는 데로 가져다 붙인 이름들도 많다. 이 책의 주인공 헥토르는 화산이 폭발할 때 '펑'하고 세상에 던져진 아이다. 당연하게도 이 아이에겐 부모가 없다. 헥토르는 상대가 징그러운 뱀, 무서운 사자라 할지라도 꼭 껴안아보고 싶어하지만, 외딴 숲 속에 사는 헥토르에게 친구라고는 도마뱀 민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인 김수영의 산문 가운데는 이런 논지의 이야기가 있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날 밤 자기 아이들이 어여뻐서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를 만져주었을 거다. 그러다 문득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을 게다. 그리고 스스로에게서 뱀 같이 차가운 소시민적 가족주의를 느껴 화들짝 놀라는 대목이 있다. 읽은 지 오래된 대목이라 정확한 내용을 언급하긴 어려워도, 난 김수영의 이런 반성, 성찰에 당시에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잠든 아이들의 이마를 짚어주던 시인이 어느날 밤 문득 들었을 상념이란 대개 아이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별처럼 느끼거나 신이 준 선물처럼 생각하는 게 고작 아니던가. 김수영이 그런 시인이었다면 그의 시는 보다 쉬웠을 것이고, 보다 많은 감성적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그가 그런 시인이었다면 최소한 나에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첫손에 꼽는 시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거다.

김수영의 그 놀라운 자의식이 나로 하여금 그를 최고의 시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 악마에게 유혹당하기 가장 쉬운 영혼을 지닌 이들은 고아 혹은 고아의식을 지닌 이들이다. 그렇기에 악마적인 상상력을 보이는 아니메 "에반게리온"에서 에바의 파일럿으로 양성되는 아이들은 죄다 고아로 채워진 게 아닐까. 내가 이런 말을 주저없이 하는 이유는 고아들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 고아였으니까, 만약 이것이 모욕이라면 내가 가장 먼저 당하는 것이다.

노르만 핀켈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은 원래 보통 명사이던 "홀로코스트(대학살)"이 어떻게 유대인 대학살만을 지칭하는 단어로 재탄생하게 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유대인만 학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자국 내에서 장애인들을 조직적으로 죽였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독일 내의 쓰레기(?)들을 처리하기 위해 "장애인.아동 안락사 계획"을 수립(1939년)하고 이들을 집단수용한 뒤 처리(?) 했다. 유대인 최종해결책이 나온 것은 1942년의 일이었다. 이들(장애를 가진)의 가족들은 모두 작은 종이상자에 담긴 유골가루와 정부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엔 고인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정부에 문의하지 말라는 게슈타포의 경고가 적혀 있었다.

세상에 갓 태어난 누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일어서서 걷는다. 그리고 잠시 후엔 뛰어다닌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아이들은 태어났을 땐 그저 연약하고 이름없는 살덩이에 불과하다. 불그스름한 피부에 머리가 몸통보다 큰 4등신의 육체에, 머리둘레는 평균 32cm, 신장은 50cm, 호흡은 1분에 40번, 맥박은 1분에 120번 정도인 이 작은 고깃덩이로 세상에 나온다. 원시시대 인류는 평균적으로 약 40%가 14세 미만으로 숨졌고, 3%만이 50대를 넘겼다고 한다. 학자들마다, 지역마다 추정치가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원시 시대 인류의 부모들은 오래 살아봐야 대개 17-18세 미만이었다. 오늘날 영양 상태가 좋아져서 초등학교 4-5학년 무렵부터 첫 생리를 하는 여학생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런 영양 상태가 되지 못했을 테니 아무리 잘 보아주더라도 14-15세가 되어야 가임연령이 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14세에 첫임신을 하고, 10개월 뒤에 아이를 낳는다고 하면 대개의 어머니들은 첫 아이를 16세 정도에 볼 것이다. 첫 아이의 수유 기간을 3개월로 보면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두 번째 돌을 맞을 무렵엔 이 세상에 없을 지도 모른다.

아이를 길러 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인류의 아기가 2살 무렵 외부의 보호 없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0%다. 그렇다면 원시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아 현생 인류에 이어졌을까?
  
어느 폭풍이 몰아치던 날, 헥토르는 숲으로 밀려든 바닷물에 휘말려 민튼과 함께 바이킹의 나라에 도착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헥토르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라틴어로 이방인을 뜻하는 "hostis"가 '이방인'과 동시에 '적'을 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바이킹들이 헥토르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뭔가 피해만 입게 되면 이방인인 헥토르를 원망하고, 헥토르 때문이라고 탓한다.  오로지 질다만이 헥토르를 친구로서 인정해 준다. 사람들은 빨갛게 타오르는 헥토르의 머리를 보고 마을에서 발생하는 모든 우환을 헥토르 탓으로 돌린다. 단지 남이라는 이유로,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헥토르를 미워할 수 있는 수 많은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종종 인간 사회는 이렇듯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미워할 대상을 찾아 모두 공분함으로써 조직의 안전과 단합을 도모한다. 그것은 우리가 원숭이 시절부터 몸 안에 지니고 있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원숭이들은 자기 가족간의 결속력을 도모하기 위해 길을 잃고 자신들 영역 안으로 들어온 다른 무리의 원숭이를 가혹하게 대하여 결국 죽게 만든다.

안나 피엔버그의 이 동화의 결말은 매우 해피하다. 사람들은 헥토르의 단점이 곧 그만의 장점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자 이 책의 단점이다. 헥토르가 그 사람들,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역시 발상의 전환 덕인데, 그 발상의 전환이란 것이 자본주의적 유용성의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헥토르의 몸에서 나는 열은 연어를 데우고, 욕조를 덥히는 일에 쓸모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매우 중요한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최초인 1932년 5월 20일 대서양을 단독으로 횡단 비행했다. 물론 그보다 오래전인 1927년 찰스 린드버그는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했다. 물론 에어하트의 업적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에어하트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대서양 횡단비행 기록" 자체가 아니라 그녀를 "여성으로서는 최초"라며 그녀를 재발견해준 이들의 공로가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 타인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아니고, 구태여 유용한 능력, 가치의 재발견이 없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안나 피엔버그와 킴 갬블은 모두 호주인이다. 유럽인이 오기 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대륙이자 닫힌 섬이었다. 그 실례로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개(dog)란 짐승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곳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성화의 최종 봉송자였던 캐시 프리맨과 같이 애보리진 원주민들이 살던 곳이다. 그녀가 시드니 올림픽의 최종 성화주자로 선정된 까닭은 무엇보다 그네들의 원죄에 대한 사과와 화해라는 정치적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가해자이자 이주민인 백인이 피해자이자 대륙의 주인인 애보리진에게 화해의 손짓으로 용서를 구함으로써 인종간 대립을 해소하고 나아가 호주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 보려는 것이었다. 1770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를 영국령으로 선포하고 8년 뒤 1,500여명의 첫 이주민들이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이들 이주민 가운데 50% 이상이 범죄자들이었다. 이들이 이주한 뒤부터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은 단지 원주민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그들은 이들을 노예로 부릴 가치도 없을 만큼 원시적이라 생각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게다가 1910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전체 원주민 인구의 4분의1에 해당하는 10만 명의  어린이들이 호주 정부의 격리 조치(문명화)에 따라 집에서 쫓겨나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이들은 1800년대부터 1969년 사이 국가에 의해 강제로 가족에게서 분리돼 정부운영 기관에서 키워지거나 백인가정에 양육되었다. 그들은 원주민과 원주민 자녀들에게 '백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다. 이것이 호주 정부의 정책이었다. 우리들은 이들을 가리켜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s)'라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이민가지 못해 안달나는 나라에서 행해진 조직적인 차별이자 인종말살정책이었다. 그것이 환경천국, 이민천국으로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숨길 수 없는 과거사이다. 결국 채 200년이 못되어 원주민은 39만명만 남았다.

호주의 백인들은 애보리진에게서 인간으로서의 가치, 아무런 효용성도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김수영이 그날 밤 했던 반성 - 자신의 소시민적 가족주의에 대한 - 의 내용은 내 자식만 이렇게 어여쁘다 하는 자신의 그 소시민적 근성에 대한 반성이었다. "에반게리온"에서 특무기관 "네르프(NERV)"가 고아들을 집단적으로 양육하며 에바의 파일럿으로 키웠던 이유는 이들의 영혼이 악마도 될 수 있고, 신도 될 수 있는 에바의 파일럿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은 고아들의 외로움이 에바의 영혼과 싱크로(동조)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원시인류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첫번째 의문에 대해 답을 해보자.

인류의 기원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원시인류는 원숭이들과의 첫번째 생존경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안전한 숲속 생활에서 밀려나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류가 안전한 숲 속 생활에서 내몰린 나머지 나무에 매달리는데만 이용되던 앞발을 손으로서 이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손을 이용하기 위해 직립 보행을 하게 되었으나 인류는 아직 생존경쟁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원시적 생활 속에 인류는 병균과 천적들 때문에 불과 17-8세의 짧은 수명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던 까닭은 갓 두 돌이 된 아기들을 공동체가 공동으로 보살피며 키워냈기 때문이다. 사바나의 왕자로 군림하는 사자는 무리의 암사자를 놓고 경쟁하다 승리한 뒤엔 다른 숫사자의 새끼들은 모조리 물어죽인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들은 남의 아기라고 내치지 않고, 그들은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보호하고 양육하였다. 공공육아라는 고차원적인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실천하는 가운데 인류공동체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신영복 선생은 연대의 기본은 "하방연대"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연대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하는 것이다. 그 말은 연대란 서로 동등한 존재끼리 맺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존재와 맺을 때 연대의 진정한 의미가 생겨나는 것을 뜻한다. 정상인은 비정상인과, 남성은 여성과,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고용주는 고용자와 한국인 노동자는 외국인 노동자와 굳건한 연대를 맺을 때 비로소 연대의 진정한 의미는 완성되는 것이다. 종종 사회복지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가난은 국가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복지 예산 측정에 대해 낭비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종종 인류의 생활방식을 원시의 그것 혹은 야만의 적자생존으로 되돌리고 싶어한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인류가 오늘날까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그것,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용과 연대의 정신에 비롯되었다고 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인류의 것이 아니라, 사자들, 하이에나의 것이다. 만약 인류가 신자유주의자들의 그 충고에 따랐다면 우리는 숲에서 쫓겨난 그때 전멸했을 것이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 광범위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는 '일탈'의 허용범위가 넓고, 그만큼 폭력적인 범죄의 비율이 낮다. 그러나 획일성이 강요되는 사회,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는 사회는 그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정상'의 범위가 협소하고, 자신들과 조금만 다르면 폭력적으로 이를 교정하려 든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여기고, 이들을 소외시키는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며 이들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의식은 결국 폭력적인 해법을 불러들이게 된다.  일탈에 대해, 마이너리티에 대해 관대한 사회는 전체주의, 편견에 가득찬 협소한 정상(?)의 사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사회적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이 지닌 피부 색깔이나 선천적인 특성으로 인해 판단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지닌 인격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누구나 자신이 갖는 속성에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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