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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조금새끼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을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더보기
안현미 - 음악처럼, 비처럼 음악처럼, 비처럼 - 안현미 새춘천교회 가는 길 전생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을 때 흩뿌리는 몇 개의 빗방울 당신을 향한 찬송가 같았지 그때 우리에게 허락된 양식은 가난뿐이었지만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열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찬송가 불렀었지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그걸 음악이라고 불렀지 예배당 앞에 나란히 앉아 기도 대신 서로가 서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줬던가 그 교회 길 건너편엔 마당에 잡초 무성한 텅 빈 이층 양옥집도 있었던가 그 마당에 우리의 슬픔처럼 무성한 잡초를 모두 뽑고 당신의 눈썹처럼 가지런하게 싸리비질하고 꼭 한 달만 살아보고 싶었던가 햇빛 좋은 날 햅쌀로 풀을 쑤어 문풍지도 바르고 싶었던가 그렇게 꼭 한 달만 살아보자고 꼬드겨보고 싶었던가 그럴까봐.. 더보기
서정주 - 대낮 대낮 - 서정주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 핫슈 : 아편의 일종 * 사람들을 인솔해 미당 서정주의 기념관에 갔을 때,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그의 시에 대한 찬탄을 거듭하며 그의 행적에 대해 눈감거나 그의 행적을 지적하며 이런 시인의 기념관을 세우고, 이런 사람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물론 그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하니 내가 한 마디로 단정지어 왈가왈부하는 건 폭력적인 단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의 속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람들은 두 가.. 더보기
황동규 - 더딘 슬픔 더딘 슬픔 -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므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 어려서 할미를 어미인 양 여기며 살았다. 나 결혼하는 것까지는 보고 돌아가실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다던 할머니는 정말 나 결혼한 이듬해 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퇴근하고 돌아와 이제 막 잠들려는 찰나에 받은 전화로 할머니의 부음을 접했을 때 내가 느낀 황망함이란 당신의 죽음이 주는 황망함이 아니라 그 순간.. 더보기
허수경 -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시를 읽다보면 또, 또, 또냐? 또 '사랑'이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개의 좋은 시는 서정시고, 서정시는 곧 연애시고, 연애시는 곧 '사랑'에 대한 시이다. 사랑을 많이 체험해야만 좋은 시를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사.. 더보기
김경미 - 바람둥이를 위하여 바람둥이를 위하여 - 김경미 1 걷지 못하는 민들레가 바람을 만나니 걷잖아 탁 ! 터져서 간음 없는 마음이 흔하랴 그런 거야 욕하지 마 바람둥이들 한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2 욕하지 마 먼지처럼 어디에나 몸을 묻히는 마음 아세톤처럼 어디에서나 쉽게 마음 휘발되는 몸의 사랑 고단하게 귀한거야 * '바람둥이'란 말은 치욕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김경미 시인은 그 고단함을 아는 모양이다. "한 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바람둥이는 어쩐지 바그너의 오페라 같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아니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히 지상에 오를 수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떠돌이가 되어 폭풍우치는 바다 위를 떠돈다. 누군가에겐 .. 더보기
이병률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 줄 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 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 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 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어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 보아라 * 누군가는 내게 엉엉 소리내어 당신의 슬픔을 보여주고, 간다... 더보기
도종환 - 산경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불혹이 될 때까지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산'과 '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산은 그저 그곳에 있게 하면 되고 강은 그저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 가는 것이오 강이 멈추지 않으니 내가 강을 따라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더보기
공광규 -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더보기
김선우 - 낙화, 첫사랑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