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썸네일형 리스트형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는.. 더보기 문태준 -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 문태준 끔찍하다 조그맣게 모인 물속 배를 내 눈앞처럼 달고 올챙이가 헤엄치고 있다 아주 어둡고 덜 어두울 뿐인 둥근 배 속 다리 넷이 한테 엉겨 있다 한 통이다 한 통이 통째로 움직인다 마음 가면 마음이 전부 간다 속으로 울 때 손발이 모두 너의 눈물을 받아준다 너의 몸을 보고 내 몸을 보니 사람이 더 끔찍하다 팔을 밀어넣고 나의 다리를 밀어넣어 저 원적(原籍)으로 돌아갔으면 둥근 배 속 아직은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이라는 말에 태동(胎動)이 있기 전 출처 : 현대문학, 2007년, 9월호 * 남진은 란 노래에서 목놓아 노래 부른다. "다앙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것을"이라고... 바다야, 이별이 있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으련만 대중.. 더보기 켄트 M. 키스 - 그럼에도 불구하고(The Paradoxical Commandments) 그럼에도 불구하고(The Paradoxical Commandments) - 켄트 M. 키스(Kent M. Keith, 1949~ ) 사람들은 때로 분별이 없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 당신이 선을 행할 때도 사람들은 이기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 당신이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거짓 친구와 진정한 적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오늘 행한 좋은 일은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의 솔직함과 정직으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정직하라. 가장 위대한 이상을 품은 가장 위대한 사람도 가장 악랄한 소인배에 의해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 더보기 김정란 - 눈물의 방 눈물의 방 - 김정란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작고 작은 방 그 방에 사는 일은 조금 춥고 조금 쓸쓸하고 그리고 많이 아파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 숨겨져 있는 나지막한 속삭임소리가 들려 아프니? 많이 아프니? 나도 아파 하지만 상처가 얼굴인 걸 모르겠니? 우리가 서로서로 비추어보는 얼굴 네가 나의 천사가 네가 너의 천사가 되게 하는 얼굴 조금 더 오래 살다보면 그 방이 무수히 겹쳐져 있다는 걸 알게 돼 늘 너의 아픔을 향해 지성으로 흔들리며 생겨나고 생겨나고 또 생겨나는 방 눈물 속으로 들어가 봐 거기 방이 있어 크고 큰 방 * 세상은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많은 것을 누려본 기억도 별로 없지만 세상은 한 가지를 주면.. 더보기 도종환 - 책꽂이를 치우며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 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나는 도종환 시인의 이 시가 머리로 꾸민 시가 아니라 정말 일상에서 시인이 직접 대면한 그 순간의 일부를 시로 옮긴 것이라 생각한다. 신혼 살림을 13평 짜리 방 두개의 작은 연립에서 시작했다. 방 하나는 부부 침실,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책창고였다. 우리 부부가 가장 먼저 생각한 혼수는 책꽂이였는데, 좋은 책장을 들일 수 없어 동네 가구점에 부탁해서 책장 여섯 개를 맞췄다. 책장 여섯 개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작은 유리창 하나도 허락할 수 없으리만치 책으로.. 더보기 고정희 - 고백 고백 -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 짧은 시에는 감상 평도 짧아야 옳으리 나는 찌 리 릿 더보기 최승자 - 삼십세 삼십세 -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릎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 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아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릎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언젠가 안도현 시인의 초청강연 자리에서 그가 말하길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를 가졌고, 김용택은 '섬진강'을 가졌는데, 자신은 기껏해야 '연탄재'뿐이라고 말.. 더보기 이승희 - 사랑은 사랑은 - 이승희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 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히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 이.. 더보기 허영자 - 씨앗 씨앗 - 허영자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 부드럽고 쓸모있는 것들이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고집세서 쓸데 없는 것들이 오래 남는다 쓸모없어 찾는 사람도 없는 외롭고 쓸쓸하게 방치되어버린 오직 꼭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남겨진 것 자신을 죽여야만 살릴 수 있는 것 죽기 전까지 고독하게, 쓸쓸하게 자신을 버림받도록 만든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고, 삭히지 못하고 저버러지 못하고, 내버리지 못하고 무엇 하나 썩도록 버려두지 못하고 온전하게 품어내야만 제 쓸모를 다하는 것 그것은 가장 나중까지 남아야만 알아 볼 수 있다 고독하게 오래도록 버림받은 당신의.. 더보기 권현형 -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푸른 만돌린이 있는 방 - 권현형 나환자 마을이었다가 전쟁으로 불타버려 다시 들어섰다는 마을, 당신이 사는 그곳의 내력을 이야기할 때 문득 당신이 붉은 꽃잎으로 보였지요 나병을 앓고 있는 젊은 사내로 슬픈 전설의 후예로 나무 잎새들 당신의 머리카락 햇결처럼 물이랑 일던 초여름이었지요 꽃잎, 작디 작은 채송화들이 마당 가득 재잘거리고 있던 그 집, 그 방, 당신 방에는 작은 악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아무도 한 번도 켜본 적 없다는 흰 벽 위에 벙어리 만돌린이 내걸려 있던 방 당신이 좋아한다는 여자의 편지를 읽어주던 내가 없던 다른 여자가 있던, 햇살이 엉켜 어지럽던 그 골방처럼 모든 내력은 슬프지요 켤 수 없으므로 아름다운 푸른 만돌린에 대한 기억처럼 * 일본의 게이샤들이 누군가의 소실이나 반려로 간택되어 .. 더보기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2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