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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박제영 -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 '시'란... '~란' 말로 시작되는 모든 말은 시가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시가 세상 만물의 조화에 참여하는 방법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한국어에선 대체로 '~란 ~이다.'의 형태로 표현된다. 시인은 "그리움이란~" 무엇무엇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말.. 더보기
차라리 면죄부를 팔아라 - <경향신문>(2009.09.20) 차라리 면죄부를 팔아라 “법제로써 이끌고 형벌로써만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면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러나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로잡게 될 것이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다. 물론 누구나 알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공맹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란 사실을 말이다. 어릴 적에 본 코미디 프로그램에는 종종 서민적인 도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했다. 이른바 생계형 범죄인 셈인데 교육을 염려해서인지 도둑은 번번이 담벼락을 넘지 못하고 도리어 시청자들에게 일장훈계를 늘어놓곤 했다. 비록 나는 이렇게 살지만 당신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의 정부가 이전의 .. 더보기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 <경향신문>(2009.06.22)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초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고 했을 때, 범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조직으로 보이던 검찰도 대통령 앞에서는 움찔한다며 통쾌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하며 역시 검찰보다 높은 권력을 지닌 것이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대통령은 기업의 오너이고, 검찰은 휘하의 비서실이나 기획실쯤 되는 기관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권위주의 정권 시절 검찰은 권력의 시녀로, 민주화 이후엔 가장 중요한 개혁 수단이자 파트너였다. 국민들은 검찰이 휘두르는 칼자루를 보며 정부가 추진할 개혁과 정책의 내용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이 ‘개혁의 수단’이 아닌 ‘개혁의 대상’이라고 .. 더보기
고영민 - 나에게 기대올 때 나에게 기대올 때 - 고영민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이 늦은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 보면 옆에 앉은 한 고단한 사람 졸면서 나에게 기댈 듯 다가오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몸을 추스르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올 때 되돌아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흔들림 수십 번 제 목이 꺾여야 하는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 잠든 네가 나에게 온전히 기대올 때 기대어 잠시 깊은 잠을 잘 때 끝을 향하는 오늘 이 하루의 시간, 내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어 나 아닌 것 거쳐 나인 것으로 가는, 이 덜컹거림 무너질 내가 너를 가만히 버텨줄 때, 순간, 옆구리가 담장처럼 결려올 때 : 고영민, "악어", 실천문학 * 고등학.. 더보기
신해철 발언과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 - <경향신문>(2009.5.11.) 신해철 발언과 ‘우리집에 왜 왔니’ 놀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합당한 주권에 의거하여, 또한 적법한 국제절차에 따라 로케트(굳이 ICBM이라고 하진 않겠다)의 발사에 성공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서 경축한다. 핵의 보유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는 약소국의 가장 효율적이며 거의 유일한 방법임을 인지할 때, 우리 배달족이 4,300년 만에 외세에 대항하는 자주적 태세를 갖추었음을 또한 기뻐하며, 대한민국의 핵 주권에 따른 핵보유와 장거리 미사일의 보유를 염원한다.” 가수 신해철이 새로운 앨범을 준비하던 중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섯줄의 글을 올렸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앨범 홍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 평가 절하하는 이도 있고, 그의 사회비판정신에 대해 나름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 더보기
1%의 귀족을 위한 '이런 나라' - <경향신문>(2009. 3. 30.) 1%의 귀족을 위한 '이런 나라'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도 일본 닌텐도처럼 창의성 있는 제품을 개발할 수 없느냐?”고 말했다는데 일본의 튼튼한 문화적 인프라에 기초한 이러한 제품을 건물 짓듯 단기간 내에 만들어내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 중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누리며, 영화 의 원형으로도 평가받는 작품이 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웃는 남자(스마일맨)’ 같은 캐릭터 설정만 살펴보더라도 깊이 있는 인문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웃는 남자는 얼마 전 구속된 미네르바처럼 사이버세계 속에서 가면을 쓰고 기업의 잘못된 이윤추구와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도전했다가 정보기관에 추적당하는 인물이었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사람들이 영화 의 가이 .. 더보기
정현종 - 가객(歌客) 가객(歌客) -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답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하고.. 더보기
대한민국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경향신문>(2009.02.09.) 대한민국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아카데미 영화제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젊어지고 싶다는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충고가 담겨 있다고 한다. 80세의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젊어지는 주인공 벤자민 버튼처럼 지난해 건국 60주년을 맞이했던 대한민국의 시간도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이제 며칠 후면 이명박 대통령 취임 1주년인데 그 사이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대통령 취임 보름 전에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탔다. 대통령인수위는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란 비판 속에 영어몰입교육과 ‘어륀지’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취임 직.. 더보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 - <경향신문>(2009.01.08.)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 신문을 펼쳐보니 새해 벽두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순으로 살벌한 기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중문화의 복고열풍이 거센 탓인지 신문마다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기사들이 줄지어 실려 있다. 그중 하나가 90년대만 하더라도 자신의 소신대로 수사하는 강직한 검사 이미지로 존경받아왔던 임채진 검찰총장의 발언이다. 얼마 전 그는 검찰의 ‘신년 다짐회’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경제난 타개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말했다. 요즘 들어 자주 보게 되고,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운운하며 국민들을 윽박지르는 광경이다. 언제부터인가 ‘반공’을 대신하여 대한민국의 새.. 더보기
문정희 - 남편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아가는 일 중 제일 견딜 수 없는 건, 아내 이외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된다는 거다. 그리고 더 견딜 수 없는 건 그건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감기 같은 거라는 사실이다. 알아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