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TERACY/WORK

차라리 면죄부를 팔아라 - <경향신문>(2009.09.20)


차라리 면죄부를 팔아라




“법제로써 이끌고 형벌로써만 다스린다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하면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러나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로잡게 될 것이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다. 물론 누구나 알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공맹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란 사실을 말이다.

어릴 적에 본 코미디 프로그램에는 종종 서민적인 도둑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했다. 이른바 생계형 범죄인 셈인데 교육을 염려해서인지 도둑은 번번이 담벼락을 넘지 못하고 도리어 시청자들에게 일장훈계를 늘어놓곤 했다. 비록 나는 이렇게 살지만 당신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의 정부가 이전의 정부들과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는 것은 지켜보는 이들의 견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매번 되풀이되는 공통점은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이자 엘리트로서 공익을 위해 봉사해야 할 총리, 장관을 선발하는 인사청문회 때마다 후보자들의 불법·위법 사례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역대 정부의 장관 후보자들에게 위장전입은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돼왔다. 그러나 지금은 청와대가 앞장서 그것이 결격 사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집권여당 내부에서도 자녀교육을 위한 위장전입은 문제가 안된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통일부, 환경부, 여성부 장관 후보자와 청와대 사회정책수석과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이 주소지를 옮겨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았고, 이들 가운데 세 명이 중도 사퇴했다. 인사청문회가 후보자들의 관운을 평가하는 시험장이 아니라면 모두에게 동일한 원칙이 적용돼야 하는 데도 청와대는 도리어 소모적인 논쟁을 그만하자고 말한다. 후보자들이 입을 모아 변명하는 것은 맹자의 어머니처럼 자녀의 교육을 위해 그러했으니 너그러이 이해하고, 선처해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변명에 가슴이 더욱 답답해지는 까닭은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이라는 사람들이 범법자가 되면서까지 추구하는 ‘자녀교육’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정부는 최근 중도실용의 서민정치를 표방하고 나섰는데, 일반 서민들은 위장전입 사실이 한 번이라도 발각되면 벌금을 물고 기소돼 전과자가 된다. 엘리트들 중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하나 없으니 나중에라도 ‘위장전입’은 위법이 아닌 것으로 법을 개정할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현재까지 위장전입은 부동산 투기를 위해서건, 탈세를 위해서건, 자녀교육을 위해서건,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행위다. 헌정 질서를 수호해야 할 대통령부터 시작해 총리, 법무부 장관, 대법관, 검찰총장 후보자도 모두 범법자다 보니 국민들은 형벌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교묘히 법망을 피해 출세할까만 욕망하고, 고민하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나는 도둑이지만 당신들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는 건 코미디도 아니다.

인사청문회를 바라볼 때마다 한국사회의 지배엘리트 재생산 구조를 지탱하는 진정한 실체는 자녀교육을 위한 ‘위장전입’이란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식의 교육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부모가 그깟 불법행위쯤 하고 눈감아 버리고, 그런 부모 밑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이들이 다시 출세하여 사회의 지배엘리트로 재생산되는 구조 속에 인사청문회를 백 번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차라리 중세 교회처럼 이들에게 재산헌납을 조건으로 인사청문회에서 장관 자리를 주는 면죄부를 파는 것이 국민들 입장에서는 좀더 실속 있는 선택이 아닐까 싶다.